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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수집가 Oct 20. 2021

개가 살지 않는 집(11)

육아 총량의 법칙

 몇년 전, TV에서 어느 집 노견의 말년과 죽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노견의 모습이 그렇듯 눈이 움푹 파이고, 푸석푸석한 것이 기운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화면 속 그 개는 여전히 주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화면 속 가족들은 얼마 남지 않은 그 반려견을 위해 여행도 가고, 유모차에 태워 열심히 산책도 시켜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울먹이며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그걸 보는데 눈물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또 하필 엄마와 함께 봤는데 앞서도 얘기했지만 우리 가족은 여간해서 서로 보는 앞에서 눈물 같은 건 흘리지 않는다. 엄마 바로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닦느라 혼났다. 그리고 엄마 앞에선 하품하느라 나오는 눈물로 가장 했다. 다롱이는 그때 세상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보면서 남의 일 같지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영상을 그때가 아닌 몇 년 전에만 보았더라면 그 슬픔을 한껏 유예시켰을 것이다. 다롱이는 언젠간 죽을 거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안도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 다롱이에게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을지 알 수가 없었고, 이젠 무엇으로도 유예시킬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1년 하고도 몇 개월이 지나자 정말 다롱이도 그 TV 속 노견처럼 점점 뭔가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때 나는 다롱이를 위해 정말 많이 기도했다. 모르는 사람은 뭘 개를 위해 기도하나 할지 모르지만 안 할 수가 없었다. 반려가 아니던가. 아프지 않고 오래 살게 해 달라는 기도는 이제 의미가 없었다. 그저 다롱이의 하루를 위해서만 기도할 뿐이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어느 날 무지개다리를 건너게 되거든 고통 없이 건너게 해 달라는 기도만 했다.   

 하지만 다롱이가 죽는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개는 죽을 때가 되면 잠을 많이 잔다고 하는데 다롱이는 그렇지 않았다. 오전에도 거의 토막잠을 잤고 그나마 오후가 되면서 저녁 먹을 때까지 제법 오래 잤다. 

  이상한 건, 여름날 먼동이 틀려면 아직 2, 3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데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깨서 끽끽 대고 울었다. 그럴 때면 난감하기 이를 때가 없었다. 우리만 살면 모르겠는데 녀석의 우는 소리가 옆집에까지 피해가 갈까 봐 신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쓰였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걸 녀석도 아는 걸까 아니면 우리와 정을 떼겠다는 것인지 그 소리는 그리 유쾌하지도 않았고 쉬 그치지도 않았다. 어떤 땐 녀석은 엄마와 나를 상대로 주인이 나를 끝까지 책임져 줄 건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는 덩달아 신경이 예민해져 잠을 설쳤고 다롱이에게 화를 냈다. 

  하긴 긴 병에 장사 없다지만 그래도 어떻게 다롱이에게 그럴 수 있는지.  2년만 더 살자고 노래를 부르다시피 했던 엄마는 어디로 갔는지 낯설게도 느껴졌다. 

  급기야 엄마는 다롱이는 어차피 죽을 것이니 안락사를 시키자고 했다. 물론 오죽했으면 그런 말을 할까 싶기도 했지만 예전 같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가 얼마나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데. 

  그러다가도 아니다 싶기도 했다. 엄마는 원래 판단이 빨랐다. 아니다 싶으면 바로 포기했다. 더구나 다롱이만큼이나 엄마 역시도 죽음과 가까이 있다. 노인에게 죽음은 어떤 것일까, 그런 의구심도 들었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지만 다롱이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엄마가 자꾸 그러니까 나도 덩달아 흔들렸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다롱이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락사는 아닌 것 같다. 안락사는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정말 치료가 불가능하고 너무 고통스러우면 할 수 있는. 다롱이는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다롱이가 저리 기운이 없고 정신이 없어서 그렇지, 사람도 죽을 듯이 아프다가도 잠시 반짝하고 정신이 날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럴 때 18년간 자신을 변함없이 키워 준 주인으로부터 배신당한 것을 안다면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될까. 또한 우리는 우리대로 안락사시켰다는 그 죄책감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가장 좋은 건 다롱이 스스로가 죽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나는 더 열심히 그게 몇 시가 됐든 엄마가 깨기 전에 녀석이 울면 바로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돌봐주곤 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다롱이를 갓난아기 재우듯 팔에 안고 흔들어 줬는데 그러면 신통하게도 곧 잠을 잤다. 그걸 밤낮으로 해줬다. 어떤 땐 낮에 엄마가 잠시 낮잠을 자면 나는 녀석을 포대기에 싸 내 방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서 흔들어 주며 책을 보기도 했다. 그래 봐야 얼마 못 있어 불편하다고 낑낑대지만. 

 그때 문득 육아 총량의 법칙이 생각났다. 

 다롱이가 건강할 때도 육아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그건 어쩌면 육아도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 역시 외손주를 세 명이나 보았지만 녀석들이 한창 자랄 때 어딘가 아프다는 핑계로 돌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형부 따라 가족이 지방에서 살았기 때문에 돌봐 줄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다롱이에게서 그 총량을 적용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도 그렇고.

 심지어 다롱이가 그렇게 췌장염으로 특수 사료를 먹기 시작할 때 혹시 어떻게 될지 몰라 기저귀를 사 둔 적이 있었다. 그동안은 쓸 일이 별로 없어서 이걸 괜히 샀나 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엄마가 그걸 우습게 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말은 없었지만, 설마 이걸 쓸 날이 있겠냐며 쓸데없는데 돈 쓴다는 묘한 표정을 지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걸 쓰고도 뒷날 몇 봉지는 더 사서 썼다.  엄마는 처음엔 이것을 서툴러했고 나중에 겨우 익숙해졌다. 그동안 다롱이가 싸 놓은 오줌 때문에 이불 빨래는 또 얼마나 많이 했던지.  

 제일 마음이 아팠던 건 다롱이에게 할 수 없이 수면제를 먹어야 했을 때다. 

 그렇게 잠을 자지 않으니 결국 특단의 조처로 병원에서 처방을 받아 먹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멋모르고 초저녁에 먹였는데 이상하게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밤늦은 사간에 먹였더니 안 먹이는 것보단 낫긴 했지만 그래 봐야 이른 아침 시간까지 밖엔 가지 못했다. 

 새삼 다롱이가 강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종종 그때 TV에서 봤던 그 노견의 말년을 떠올리곤 했다. 그건 단 몇 분으로 압축해서 보여줬기 때문에 마냥 안쓰럽고 슬퍼할 수 있었다. 그 노견도 죽음을 맞기까지 나름에 고충이 있지 않았을까. 

  역시 영상은 편집된 거라 다 믿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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