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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수집가 Oct 22. 2021

개가 살지 않는 집(12)

예정된 시간 속으로...

 이제 다롱이는 밥을 먹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 녀석은 스스로 밥을 먹지 못해 잘게 부순 견방을 물에 개어 경단처럼 만들어 입에 넣어주곤 했었다. 

 그 무렵 TV에 반려견 여러 마리를 키우는 어느 유명 여자 가수가 자신이 키우던 반려견이 죽는 과정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먹던 밥을 끊고 물만 먹다 그 물조차 안 먹으면 정말 죽는 거라고 했다. 그 말대로라면 다롱이 역시 그 수순을 밟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동안 다롱이는 하루하루 야위어 갔다. 언젠가 올 시간이 지금 온 거라는 걸 알지만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내가 지금 다롱이에 대해 잘못 판단하는 것이길 바랐다. 

  왜 동물은 아프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웅크리고 있다가 스스로 털고 일어나기도 한다지 않는가. 다롱이도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지막까지 그 헛된 바람을 꿈꿨던 것도 사실이다. 또 그런 상상을 하니 묘한 희망이 생기는 것 같기도 했다. 

  물은 과도하다 싶으리만치 많이 먹었다. 이상한 건 그렇게 많은 양의 물을 먹었는데도 소변량은 오히려 현격하게 줄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가수의 말만 믿고 다롱이도 어느 순간 물도 먹지 않을 때가 오지 않을까 지켜봤다. 

  그러다 정말 물을 안 먹은 때가 있었다. 그땐 정말 다롱이가 죽는 줄 알고 울면서 거즈 손수건에 물을 묻혀 입에 대 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물을 먹었다. 순간 적어도 지금 죽은 건 아니구나 했다. 그렇게 죽는 날까지도 물을 많이 먹으니 마지막 날에도 설마 죽을까 했다.  

그저 어제와 같은 날이 되겠지 했다. 그날은 그런 상태로 버틴 지 일주일 되는 날이었다. 이 상태로라면 잘해야 4, 5일은 버티지 않을까 싶었는데 새삼 그 시간까지 버텨준 녀석이 고맙고 대견했다. 그런 걸 보면 어렸을 때부터 잘 먹어둔 덕분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다롱이가 죽자 엄마는 비로소 녀석에게 안락사시키자는 말을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렇게 갈 건데 안락사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제 안락자는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모든 생명체가 마지막이라고 해서 다 안락사를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있겠지만 끝까지 살 권리도 있는 것이다. 그걸 사람은 기다려줘야 한다. 사람은 개 보다 강하지 않는가.


  다롱이가 죽자 한동안 귀에서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자꾸 어디선가 조그만 신음소리가 나는 것 같았고, 정말 무지개다리 저 너머가 있는 건지 거기서 녀석이 우리를 생각하고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또한 녀석의 몸에서 나던 퀴퀴한 냄새도 코끝에서 쉽게 잊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실수로 물그릇에 코를 박고 허우적거리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한동안 이런 기억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럴 때면 이제 그곳에 저와 같은 친구들이 많을 텐데 함께 잘 지내야지 언제까지 사람만 찾을 건가 나무라 주고 싶기도 했다. 하긴 녀석은 우리 집에서 외둥이로 자랐기 때문에 사회성이 현저하게 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죽음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몇 시간 또는 며칠, 몇 달 전만 해도 분명히 살아있는 생명체가 사라지고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다롱이는 오래전부터 죽음의 여러 징조를 보였고 살아있는 우리는 그걸 충분히 인지했음에도 숨이 끊어지고 나면 그건 전혀 새로운 국면이 된다. 그 여가수 말대로, 죽는다 죽는다 하는 것과 정말 죽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인 것 같았다. 다롱이는 예정된 시간 속으로 옮겨갔고, 우리의 애도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난 이 시간이 항상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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