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다롱이는 상위 13% 안에 드는 운 좋은 나의 반려견
다롱이는 2021년 8월 15일 날 죽었다.
그로부터 3일 후는 오빠의 8주기였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우울했지만 올해는 다롱이를 보내느라 그런가 그런 걸 느낄 새도 없었다. 다롱이가 죽은 날로부터 꼭 한 달 후는 나의 생일이기도 했다. 뭔가 절묘하단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든 자리는 표가 안 나도 난 자리는 표 난다고 집을 나가나 들어오나 다롱이를 빼고 모든 것을 봐야 한다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모처럼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을 갔던 날, 작년까지만 해도 녀석의 털을 깎았던 개 미용실을 지나쳐야 했다. 그곳엔 성실하고 싹싹한 청년 둘이 일을 한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다롱이를 픽업했는데 작년부턴 하지 않았다. 이유는 다롱이가 너무 노견이라 픽업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는 수없이 엄마가 다롱이를 데리고 가서 털을 잘라줬다. 이제 더 이상은 여기를 올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게 참 쓸쓸했다.
그리고, 오지랖 일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몇 블록만 더 가면 다롱이가 다녔던 병원이 있는데 웬만하면 가서 녀석의 부고와 그동안 잘 돌봐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은데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롱이가 죽기 한 달여 전부터 엄마와 내가 번갈아가며 약을 지어갔었다. 벌써 안 다닌 지 두 달이 넘었으니 그곳 원장도 지금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을 거다.
한 가지 위로라면, 반려견의 13%만이 가족이 보는 앞에서 죽는다고 한다. 다롱이는 그 상위 13% 안에 드는 운 좋은 강아지가 되었다는 정도.
요즘엔 길을 걷다 누군가의 반려견을 보면 얘도 13% 안에 들게 될까 걱정 반, 의심 반이 된다. 사람도 늙고 병들면 버림 당하기도 하는데 하물며 개라고. 걱정이다. 반려동물 시장은 해마다 늘어나는데 사람의 의식은 그것을 쫓아가질 못하고 있으니.
얼마 전 TV에서 '한때 우리들이 사랑한' 반려견들이 어떻게 버려지고 있는가에 대한 실태를 보는데 좀 충격적이었다. 개 농장의 실태야 제쳐둔다고 해도, 소위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유기견 보호소도 돈은 돈대로 받고 개 도축업자와 결탁해 결국 마지막에 가는 곳은 보신탕집이었다. 예쁘다고 물고 빨 때는 언제고 자신이 키웠던 개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리도 태평하게 잘 사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놀라운 건, 아직도 개를 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렇게 못할 것 같긴 하지만) 난 능력만 되면 수명이 1, 2년밖에 안 남은 개를 돌보며 살고 싶다. 물론 힘들고 슬프긴 하겠지만 그도 익숙해지면 삶과 죽음이 서로 먼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지 않을까.
내 막내 조카는 개를 너무 좋아해 대학도 관련 학과를 전공하고(반려동물 관리학과) 한동안 애견 카페에서 일하다 최근 무슨 유기견 보호소에서 정식 직원으로 채용됐다. 녀석은 이미 집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다. 언니는 저러다 둘 중 한 마리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걱정을 한다. 그렇지 않아도 한 마리는 노견인데 아직은 잘 버텨주고 있기는 한가 본데 내년을 장담하지 못한다. 그랬을 때 녀석이 슬픔을 잘 감당할지 걱정하는 것이다.(지난번 추석 명절 때 다롱이가 없는 것을 생각했을까, 언니는 녀석과 함께 상경했는데 생각보다 아직은 상태가 좋아 보였다.) 하지만 난 걱정하지 않는다. 조카는 그곳에서 일하면서 삶과 죽음을 객관적으로 보게 될 것이고, 어차피 감당해야 할 것이라는 걸 안다면 잘 감당할 것이다.
다롱이가 떠났다고 꼭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녀석이 떠나고 우리 집은 깨끗해졌다. 물 낭비도 없어졌고, 무엇보다 녀석이 건강할 땐 하루 세 번씩 (어떤 땐 네 번도) 싸 대는 똥을 치울 일도 없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린 다롱이의 보호자였구나 싶다. 연극이 끝나면 배우는 무대에서 내려와야 하듯이 다롱이가 무지개 너머로 갔으니 보호자의 역할도 끝난 것이다.
다롱이가 죽을 무렵 우린 거실의 TV에 유선을 달았다. 엄마는 이제 다롱이도 없을 텐데 TV나 보며 시간을 때워야지 뭐하며 지내겠냐고 해서. 엄마는 주로 오래된 드라마나 때 지난 예능 또는 유명 목사의 설교 방송 등을 보는 것으로 소일한다. 그게 엄마로선 더 편하고 나쁘지 않은 것이긴 할 테지만 그래도 뭔가 모르게 생기가 없어 보인다.
기계가 생명을 대신할 수 없는 건지 그렇게 TV를 하루 종일 틀어놔도 집안은 다소 적막하다. 그렇더라도 엄마나 나는 지금 다시 개를 키우라고 하면 안 키울 것 같다.
그런데 우리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서 그 또한 놀랍고 편치는 않다. 매일 같이 늘어나는 유기견을 생각하면 단 한 마리의 개라도 맡아 키워야 할 판에 다시 개를 키우지 않겠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니.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모두가 생각을 바꿔 한 마리씩만 맡아 키운다고 해도 넘쳐나는 유기견을 감당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래도 그 마음에 동참한다는 것만으로도 유기견이 새로운 주인에게 갈 확률은 늘어나지 않을까.
개를 키웠던 가정은 또 키우게 될 확률이 높다. 사실 우린 이제 더 이상 개는 키우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열어놓고 있긴 하다. 가끔은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다롱이를 키우기도 했고.
어느 날 그런 운명이 자연스럽게 찾아와 주길 기다려 본다.
* 지난 몇 주 동안 허접한 글을 일주일에 세 편씩 올렸다.
처음엔 다롱이를 잃은 상실감을 위로해 보고자 쓴 것인데
올릴 때마다 라이킷 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