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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Sep 17. 2020

25살, 잡캐인 게 어때서 :창작자의 우울증 극복기 4

1인분 일기-4



그림쟁이 고등학생

 

 처음엔 그림으로 시작했다.

그냥 그림 그리는 게 너무 좋았다. 그게 아기자기한 그림체의 캐릭터도 좋았고,

성숙한 분위기의 일러스트도 좋았다. 그냥 내 취향의 예쁜 것을 표현하는 거라면 뭐든 좋았던 것 같다.



위에는 고등학생 때 시도했던 다양한 느낌의 그림들.

지금 회사에 입사하기 전까지 가장 많이 해봤을 고민 중 하나가 '그림체' 다. (색감 취향만 대쪽 같다)

어떤 그림이 간에 전부 다 매력 있고, 즐거운데

계속 밀고 나가는 하나의 특색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자꾸만 했다.

나의 작가로서의 생명력이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계속 고민만 하면서 다른 작업들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처음 친구에게 포토샵을 배우고 작업한 것들

 

 늘 대화하면 자극과 동기부여를 주는 친구가 있다. 저 당시에는 어린 나이에 디자인을 했었고,

지금은 영화판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친구이다. 그 친구가 고등학생 때 컴퓨터 원격조종으로 포토샵 다루는 법을 알려줬었다.

그때 콜라주에 눈을 떠서 정말 열심히 연습하면서 이것저것 만들었다. 사진 올리려고 오랜만에 찾아보니 정말 부정적인 의미로 소름이 돋는 작업물도 많았지만 아무튼 저 땐 정말 열심히 했다(...)



끊임없이 이미지들을 보고, 합성하고, 연습하고 하다 보니 혼자서도 어느 정도 포토샵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우울증을 앓느라고 모든 것과 단절되었던 성인 이후 때 보다, 오히려 고등학생 때가 상상력은 훨씬 좋았던 것 같다.


 다행히도 포토샵으로 콜라주 작업을 하다 보니 이미지의 컬러를 보정하는 것도 자연스레 배우게 되었고,

사진을 시작하고 나서도 원하는 세계의 색감을 만드는 재미가 쏠쏠했다.


셀프촬영 + 사진 리터칭. 놀랍게도 나다..


 그러면서 사진에 브러시로 덧그려 그림 같은 질감을 주는 '사진 리터칭' 작업에도 재미를 붙였고,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도 많이 작업했었다. 이때부터 사진도 시작하고, 정물도 찍고 인물도 촬영하면서 그림을 그렸었다.

본격적으로 잡캐인 스스로에 대해 이대로도 괜찮은가 고민했던 시기.


사진을 해야 하나, 그림을 해야 하나..

여러 우물을 얕게 파면 안 좋다던데,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나?


(2017) 마지막으로 각 잡고 그린 개인 일러스트





 이렇게 이것저것 손댄 이유는 하나다.

불안감

더 잘하고 싶고, 더 많은 것을 하고 싶은 초조함.

생각해보면 나는 무엇을 해서 불안했던 적 보다,

무엇을 하지 않아서 불안했던 날이 훨씬 많았다.

잘하고 싶다는 욕망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결국 내가 더 열심히 하고,

잘하면 된다고 밖에 결론이 나지 않던 고민들.

그래서 허무했던 새벽들.

나는 돈을 지불하고 뭔가를 배우러 갈 수도 없는 상황이고,

혼자서 내 앞길을 해결해야 한다는 고민의 무게감까지.


그래서 친구에게 자극을 받고 고등학생 때는 네이버 그림 카페 활동, 카페 디자인 스탭, 벽화 자원봉사, 전시 등등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했다. 뭐라도 해야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때는 나는 아직 고등학생인데 이만큼 한다-라는 자부심도 나름 있었으나,

그거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 해가 가면 갈수록 아직 어린데, 별 것도 아닌 거에 크게 불안해하곤 했던 거 같다.

(어린 데 이만큼이나 했다는 건, 커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게 된다는 의미니까)

20살엔 20살인데 괜찮을까, 21살엔 21살인데 괜찮을까.. 매 년 반복하면서.

걱정을 사서 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비효율적인 타입이다.


영화 '아마데우스'




잡캐인 게 뭐 어때서


 결과론적 관점이겠지만, 자꾸만 다양한 걸 좋아해서 일을 벌이는 내가 지금에서야 싫지가 않다.

작은 것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개복치 멘탈이라, 순간순간은 너무 힘들지만

지나고 나서 그게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모든 경험이 결국엔 도움이 되었다.


거의 24살이 다 되어서야 카페 알바를 그만뒀고, 그 사이에 단편 영화 미술감독 알바도 해보고,

이것저것 잡다하게 보고 주워듣고 하는 게 결국 작업할 때 다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작년에 공연예술 회사인 지금의 직장에 디자이너로 입사를 했다.

(카페일을 너무 빡세게 했어서 좀 쉬는 기간을 가져볼까도 싶었지만,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이었다..)

공연 쪽 디자인은 처음이고, 아예 직장 생활이 처음인 사회생활 모지리.. 사회의 신생아라 어려운 것도 많았는데

적응한 요즘은 그래도 꽤 즐겁다.


그림체가 다양하기 때문에, 잡캐이기 때문에

비록 한 분야를 깊게 판 사람보다는 부족할 수 있겠지만 한 그룹의 구성원으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때그때 맞는 그림을 그리고, 굿즈를 디자인하고, 공연 세트도 칠하고

어떤 때는 포토샵으로, 어떤 때는 그림을 그려서 공연 포스터를 만들고 있다.

요즘은 프리미어를 공부 중이라 간단한 영상편집과 촬영은 가능해졌다.

마케팅 욕심도 생겨서 SNS 관리하면서 차근차근 공부 중이다.

다른 듯 보이는 이 장르들이 사실 관계가 전혀 없는 것들이 하나도 없어서 오히려 상호보완적으로

공부가 되고 발전할 때도 많다.

사진, 그림, 디자인은 말할 것도 없고 포토샵을 다룰 줄 알다 보니 마케팅에도 좀 더 유리해진다.



회사 작업을 올리는 건 왠지 쑥스럽지만 포스터 작업 몇 장만..



이 와중에 그림 안 그린 지 오래되니까 스멀스멀 또 회사 작업 말고도

일러스트 그리고 싶은 욕심이 솟구치는, 방황하는 반 오십이지만

뭐 어떤가 싶다. 내가 좋으면 된 것을.


뭐 어때-라고 생각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지.


나 말고도 방황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잡캐들에게 응원을 날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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