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하여
20년 동안 정말 감사하게도 아무런 부족함 없이 유복하게 자란 나는 욕심이 많은 성격 탓인지, 나태하게 지내면 불안해하는 성격 탓인지, 항상 스스로를 옥죄어 왔다. 나를 채찍질하고 발전시킨 8할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작년에 입학한 대학이 마음에 안 들어 한 학기 다니고 바로 기숙학원에 입소해 수능 공부를 시작한 일은 나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례라고 할 수 있다.
평범한 초중고 생활을 보낸 나는, 기숙학원에서 보낸 4개월 반의 시간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문명과 멀어진 채로 한 공간에 갇혀서 규칙적으로 생활했던 경험은 수능 성적과 별개로 나에게 엄청난 교훈과 가르침을 주었다. 앞으로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할 때, 기숙학원에서 공부했던 것처럼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밤 11시 반까지 온종일 공부한다면 이 세상에 못 이룰 게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나를 인격적으로 성장시켜준 소중한 인연들도 유독 그 학원에서 많이 만났다. 존경스러울 정도로 착한 사람들과 같이 지내면서 나 자신을 많이 돌아보고 반성하며 그 사람들을 많이 닮아가려고 노력했다. 살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을 것 같아, 수능이 끝난 후 먼저 연락해 만남을 가졌고, 지금도 연락을 이어나가고 있다. 내가 많이 배웠고 앞으로도 많이 배울 사람들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다.
가족을 포함한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보는 나는 기가 세고, 냉정한 편에 속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쉽게 감정을,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 아니다. 인관관계에서 마음 상하는 일이 생겨도, 속으로는 기분이 나쁘지만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는다. 내가 표현함으로써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주변 사람들까지 눈치를 보게 되는 상황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을 안 한다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분 나쁜 상황이 반복돼서 악감정이 쌓이면, 상종하기 싫어져 연을 끊어버리고 만다. 그런 부분에선 인간미 없는 것을 인정한다.
반면에 한 번 마음을 준 사람에게는 하염없이 잘해주는 편이다. 내 울타리 안의 사람이라고 느껴지면 인연을 이어나가려고 노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락을 먼저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가끔 내 마음의 크기와 상대방 마음의 크기가 비등하지 않다고 느껴지면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서운함을 절대 표출하지는 않는다. 표출을 하면 상대방 입장에서 그것을 집착이라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집착이라고 느끼는 순간 더 거리가 멀어질 것이기 때문에 서운한 감정을 느껴도 혼자 삭이는 편이다. 삭이다 보면 금방 잊히기도 한다. 며칠 지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다시 연락을 한다.
사람들과 연락을 하며 느끼는 점은, 온라인 상에서와 실제 모습이 다른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보고 연락만 하며 지낸 친구가 있었는데, 온라인 상에서 친구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차가운 느낌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만나보니 전혀 변함없는, 여전한 그 친구였다. 역시 내가 전에 본 모습이 잘못된 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내 나름의 이론까지 정립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을 보면 부류가 두 가지로 나눠진다고 느꼈던 시기가 있었다. 한 쪽은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 다른 한 쪽은 나태하게 사는 쪽이었다. 똑같은 24시간을 한 쪽은 빽빽하고 알차게 쓰고, 다른 한 쪽은 절반 이상을 허비하는 것을 보며 둘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의문을 가지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본성 대 양육’이라는 주제로 레포트를 작성하기도 했다.
이렇듯 ‘인간’관계, ‘인간’의 성격 등에 관심이 많은 내 모습을 보고 누군가 ‘휴머니즘적’이라고 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 곱씹어볼수록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특정 사람한테 관심이 있기도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관심이 많은 점은 인간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에게 관심이 많아 그것에 관한 생각을 정말 많이 하는데, 알면 알수록 제일 어렵고 복잡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을 느낀다.
요즘엔 ‘페르소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사람마다 달라지는 가면, 페르소나. 나에게는 무수히 많은 페르소나가 있다. 사람마다, 심지어 가족 앞에서도 남들 앞에서와 다른 가면을 쓰는 스스로를 보면 내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누구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사람마다 가면을 바꿔가면서 쓰는 현실이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진정한 ‘나’는 혼자 있을 때의 ‘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혼자 있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많이 든다. 그 중 90퍼센트는 그리운 사람에 대한 미련이다. 지나간 추억과 사람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어 스스로가 너무 과거지향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문제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나기 전까진 이 성향이 고쳐지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시간이 약이라고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을 내 자신을 보며 느낀다.
항상 마음속에 그리움을 품고 있지만, 현실을 살아야 되긴 하니 꾸역꾸역 열심히 살아간다. 강의건, 과제건 계획적이고 철저한 성격 탓에 미루지 않고 그때그때 끝내는 편이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할 일을 절대 미루지 않지만, 누군가 너무 미래를 위해 살다보면 현재의 소중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는 말을 한 뒤로 지금 내 태도가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바로 생활패턴을 바꿀 생각은 없다. 아직까진 할 일을 그때그때 끝내는 것이 미루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가에 있을 때는 밖에 나갈 일이 별로 없었는데, 상경한 뒤로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동아리 사람들을 만나며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 사회생활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작년에 학원에 있을 때부터 느꼈던 점은 많이 웃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나와 호의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는 사람 앞에서는 많이 웃을수록 유리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 사실을 깨우친 뒤로 너무 웃음이 헤퍼진 내 모습이 가식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지만 많이 웃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에 쉽게 바뀌진 않을 것 같다. 많이 웃는 것 또한 내 페르소나의 일종이다. 혼자 있을 때는 잘 웃지 않고, 웃을 때의 표정처럼 내면도 밝은 사람은 절대 아니다. 내면이 부정적인 것들로 인해 어두워졌다기보단 너무 많은 생각들로 가득 차 그림자가 져 어두워졌다고 할 수 있겠다. 혼자 있다 보니 외로움을 타는 것인지, 가끔 울고 싶을 때도 있다. 마음은 굉장히 울적하고 이미 울고 있는데, 막상 진짜 울려고 하면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면 그나마 괜찮아질 것 같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아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 울적하고 외로운 마음을 해소할 유일한 방법은 알고 있다. 다만 그 방법을 실천에 옮길 방도가 없어 막막할 뿐이다. 한편으로는 나만 이런지, 다른 사람들도 혼자 있을 때는 슬픔에 잠기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페르소나는 대부분 밝고 활기차다. 그들도 혼자 있을 때는 생각이 많아지고 외로워지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그걸 물어볼 사람은 없다. 물어보는 것은 내 자신이 그렇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고, 결국 내 페르소나가 벗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페르소나가 벗겨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착잡하게 느껴진다.
내가 의식해서 쓴 페르소나라도, 자꾸 쓰다 보면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나의 일부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의식적으로 웃고, 상대방을 배려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게 몸에 베어서 내 성격을 형성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배려’다. 가끔 이기적이고 배려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해가 안 됨과 동시에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배려는 정말 사소한 것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몸에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식당에 갔을 때 본인이 불편한 자리에 앉는다든지, 남의 물건을 만지기 전에 허락을 맡는다든지 등에서 그 사람의 배려심을 판단할 수 있다. 배려심이 없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본인만 생각하고 본인 편할 대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원래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게 잘못된 행동이라는 인식조차 못한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면들에서 점수를 매기는 사람들이 있으며, 안타깝게도 그 수 또한 적지 않다.
나도 그 중에 하나다. 어떤 사람의 인성이 드러나는 사소한 부분들을 잘 캐치하는 편이다. 물론 사람이 항상 좋은 면 혹은 나쁜 면만 있을 수는 없다. 다만 아까도 말했듯이 ‘배려심’이 없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다른 면에서 좋은 사람일지라도 별로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다. 꼭 배려심이 ‘없다’는 사실만 캐치하는 것은 아니다. 배려심 강한 모습도 잘 잡아낸다. 그 모습을 잡아낸 순간 그 사람을 내 나름대로 ‘착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착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정을 준다.
한 번 착한 사람이라고 인식한 사람은 후에 별로인 행동을 해도 웬만하면 좋게 보는 편이다. ‘원래 좋은 사람인데 오늘 왜 저러지.’ 생각하고 만다. 인성적인 면에서 첫인상의 초두효과라 할 수 있겠다. 반면에 한 번 ‘별로인 사람’으로 인식되면 그 후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했을 때 ‘역시 첫인상이 맞았어.’라고 생각하고 하루 빨리 연을 끊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사람 행동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점수를 매기고 연을 끊을지 말지 결정하는 내 습관을 소름끼치는 것으로 볼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와 격과 결이 달라 맞지 않는 사람을 품고 갈 이유는 없다. 그럴 자신도 능력도 없다. 그런 사람들까지 신경 쓰며 살아가기엔 소중한 사람들에게 할애할 시간과 에너지가 지금도 부족하다.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려면 필연적으로 해야 할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는 습관일 거라 확신한다.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집에만 있어 인간관계가 한정적이었을 때는 지금 내가 좋아하고 연락하는 사람에게 다소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불과 몇 개월, 며칠 전의 생각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참 어린 생각이었다고 느낀다. 서울에 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본 요근래 며칠 동안에도 괜찮은 사람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그땐 알고 지낸 사람의 폭이 좁아서 그 사람들이 전부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가 아직 못 만나봐서 그렇지,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충분히 많았다. 아직 20년밖에 안 살았으니 앞으로 좋은 사람을 만날 기회는 더더욱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알고 지내는 사람들한테 너무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필요한 인연은 어떻게든 오게 되어 있으니 너무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떠나가는 인연에 목숨 걸지 않기로 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흐름에 맡기기로 다짐했다.
흐름에 맡기는 여유를 가지려면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결국 ‘남’일 뿐이니, 그게 연인이든 친구든 너무 내 모든 걸 내주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워낙 정이 많은 성격이라 정을 안 주기는 힘들 것 같으니, 그 사람도 언젠간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기로 했다.
앞으로 만날 수많은 인연들, 수많은 기회들 속에서 ‘나’라는 사람을 가장 중요시 여기며 남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나가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보다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더 다사다난할 것이기 때문에 기대가 된다. 지금처럼, 지금보다 더 잘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