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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통번역대학원에 간다고?

대학원 입학 시험을 치르다.

때는 바야흐로 11월 28일, 무척 특별한 날이었다.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통번역대학원 입학시험을 치는 날이기 때문이다. 고작 입학시험이겠지만 나에게는 무척 특별하게 다가왔다. 시험을 친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이라고 하면 조금 오버이려나?


“서언아, 엄마 ABCD 공부하고 올 테니까 아빠랑 잘 놀고 있어!”


“엄마, 머리 아프면 내가 준 초콜릿 꼭 먹어야 돼!”


항상 집에만 있던 엄마가 긴장된 표정으로 가방을 싸는 모습을 보며 세 돌이 갓 지난 첫째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엄마가 공부하러 가는데 머리가 아플 수 있다는 말에 딸은 집에 있는 ‘페레로 로셰’를 직접 엄마 가방 속에 조심스레 넣었다. 분명 초콜릿을 먹고 싶을 텐데 참고 큰일을 앞둔 엄마에게 양보하는 거니? 


항상 마음속에 남 몰래 꿈꿔왔던 통번역대학원. 20살 다시 영어공부를 시작하며 ‘통번역가’라는 직업이 참 멋지게 다가왔고 몰래 선망해왔었다. 본격적으로 ‘통번역 입시 공부’를 시작한 건 둘째가 갓 돌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모든 시작은 첫째가 갓 돌을 지나 어린이집을 가기 시작하고 진로 고민에 빠진 와중에 우연히 부산에서 유일한 통번역가 선생님의 통번역 강의를 처음 들으면서부터였다. 당시 첫째 때 딴 놓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이용해 소속 공인중개사로 활동할지 아니면 영어강사 알바라도 해야 하나? 아이 어린이집 간 시간을 잘 활용하는 법 없을까? 고민에 빠져있었다.


20대 때 영어강사 및 회사 생활을 하며 영어 계속 썼지만 앞으로도 영어로 계속 먹고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정체되어 있었다. 통번역 대학원을 가기엔 부족한 영어 실력, 어린아이, 경제적 사정이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영어공부를 포기한 상태였지만 본능처럼 이끌려서 듣게 된 첫 통번역 강의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모든 상황이 불리했지만 가슴 뛰었다. 살면서 가슴 뛰는 일을 찾는 건 쉽지 않은데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사람은 감정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거기에 이성적인 이유를 덧붙인다는 누군가의 말이 여기에 딱 어울렸다.


“나 통번역대학원을 가야겠어! 이 일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첫 수업을 마친 뒤 친정엄마와 남편에게 폭탄선언을 던졌다. 


“나 야간 대학원 가야겠어”


의논이 아니고 일종의 선언이었다. 언제나 온화한 선비 같은 남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버렸다. 친정엄마는 여러 가지 현실을 꼬집으며 꼭 대학원을 가야 하느냐고 반대했다. 가슴이 갑갑해져왔다. 모두 아이와 제 가족의 안정은 끔찍하게도 생각하면서 아무도 ‘내 장래, 내 꿈’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인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꾸려나가야 할까?” 아무도 관심 없었다. 


가족들의 반응에 실망스러웠지만 ‘자신의 삶의 아늑함’ 최우선이 되는 게 인간의 본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을 탓할 것도 없었다. 나는 내가 챙겨야 했다.


“나도 중요해. 그러니 나를 위한 선택을 내리고 가족의 도움을 받겠어. 왜 엄마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거지? 내가 통대를 졸업하고 나면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워질 텐데 다들 현재의 아늑함만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대학원 진학 선언? 을 한 이후 모두가 탐탁지 않은 상황에서 통대 입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나면 카페로 달려가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줄곧 가벼운 화상 영어수업을 하며 즐겁게 영어공부를 해왔다면 통번역 공부는 그야말로 빡셌다. 입에서 단 내가 날 정도로 연습하고 녹음해서 들어보고 다음날 또 복습했다. 통대 입시를 준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충격적인 일이 생긴다. 

둘째가 생겼다. 그것도 연년생. 이제 나도 내 삶을 좀 살아볼까 희망으로 가득 찼고 대학원도 가야 하는데 또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려니 눈앞이 까마득했다. 


“그래... 원래 터울 있는 아이 두 명을 가질 계획이었으니 조금 일찍 둘째가 찾아왔다고 마음먹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근데 대학원은 어쩌지?”


둘째를 임신하고 아이가 한 명이라면 문제없었을 텐데 두 명이 되어버리자 갑자기 엄마의 공부, 미래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둘째를 임신하고 대학원에 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연년생 아이 두 명을 키우기란 쉽지 않으니까. 대학원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복잡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불러오는 배와 노트북이 들어있는 큰 배낭을 메고 카페로 갔다. 입덧이 너무 심한 임신 초기와 앉아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는 만삭 때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둘째가 백일쯤 지나서 다시 새벽 공부를 시작했다.


모든 게 불확실했지만 진짜 입시 공부하는 사람처럼 틈만 나면 책상에 앉았다.


통번역대학원 입학시험이 있는 날이 되었다. 그날따라 아이들은 아침 일찍 일어났고 분위기는 무척 부산스러웠다. 하루 동안 필기시험과 구술시험, 면접이 동시에 이뤄지기 때문에 화장이라도 하고 가고 싶었지만 희망과는 달리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섰다. 


떨리는 마음으로 도착한 시험장에 도착했다. 학교가 산 중턱에 있어서 실내에 있어도 꽤 쌀쌀했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필기시험을 치고 간단히 점심을 먹은 뒤 구술시험과 면접을 봤다.


반나절이 걸린 시험을 모두 마친 뒤 나오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왠지 모르게 뭉클했다. 시험 결과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정말 고생했어. 시험 결과와 상관없이 정말 열심히 준비해왔고, 시험을 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지? 장하다. 나 스스로 너무 대견하고 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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