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랜만에 보게 된 드라마 tvn 나의 아저씨
많은 이들이 인생 드라마로 꼽으며 나를 아는 사람들도 너 이 드라마 좋아할 거라며 수없이 추천해 주었는데 괜히 봤다가 더 우울해질까 봐 두려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무작정 어둡고 눈물 짜게 답답한 신파극일 것 같다는 편견을 부수고 3일 만에 정주행을 끝내버렸다.
이 드라마는 뭔가 마케팅이 잘못되었어. 괜한 오해를 많이 받은 것 같다.
다 보고 나면 어두움보다 따뜻함이 마음속에 차오르는 인간미 넘치는 드라마
스릴러, 범죄 수사물 같은 재미는 덤이다. 생각보다 빠른 전개,주조연 낭비 없이 쓰이는 살아있는 캐릭터
드라마 보고 운 적이 거의 없는데 드라마를 보면서 세 번이나 울었다.
지안이가 울고, 동훈이가 울고, 나도 울었다.
스포일러가 대량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후계동에 대한 이야기다.
후계동에는 고만고만한 인생의 적당히 망가진 사람들이 산다.
직장에선 정리되고 사업은 망해서 빚을 지고 마누라와는 별거하고 매일 술을 퍼먹는 답 없는 인생들, 그 와중에 조기축구는 빼먹지도 않고 간다.
세련되지 못하고 남의 일에 쉽게 흥분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사람들
도무지 밝은 내일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아 보이는 이미 망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
윤희(이지아)는 이 동네가 지긋지긋하다. 얼른 이 동네를 떠야지.
이 동네만 뜨면 남편 동훈(이선균)도 정신을 차리겠지.
가족이란 독립된 우리 식구를 의미해야 하건만, 동훈에게 가족은 후계동 사람들 모두를 포함한다.
우선순위가 없는 남자와 후계동에서 사는 삶은 형벌이다.
매번 밀리고 나를 후 순위로 제쳐두고 살게 되는 삶
나는 그 동네에 속할 마음이 없고 그의 식구는 모두 후계동에 있다.
그래서윤희는 망가진 그 동네에 망가진 사람들을 피하고 싶어 어디론가 도망친다.
지긋지긋한 후계동, 그렇게 그 동네와 선을 긋는 순간 이미 동훈과의 관계 또한 망가졌음을 의미한다.
인간은요, 평생을 망가질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아요. 전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엔 감독님이 망해서 정말 좋았는데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더 좋았어요.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안심이 됐어요.이 동네도 망가진 것 같고 사람들도 다 망가진 것 같은데 전혀 불행해 보이지가 않아요. 절대로. 그래서 좋아요. 날 안심시켜줘서.
-7화 유라의 대사
망가진 후계 동의 일상은 망가지지 않고 잘 굴러간다.
매일 저녁 약속 한 번 하지 않고도 모두 마주 앉아 '정희네'서 실컷 마신다.
실 없는 이야기를 하고 깔깔거리며 웃는다.
우연한 행복이 찾아오면 설레발을 치고 마음껏 축하한다.
슬픈 일이 생기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누군가 어떻게든 알아내버리고 그러면 그건 모두의 일이 된다.
대신 화를 낸다. 좀 더 오버해서 분노하고 욕을 한다. 고성을 지르고 억울해한다.
그러면 모든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누구 하나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지만 후계 동의 일상엔 묘한 치유의 힘이 있다.
망가진 인생도 일상을 유지하게 하는 힘이 있는 동네
어쩌면 벼랑 끝에 몰린 시체처럼 살던동훈이 끝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여전히 후계동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안은 다시 태어나면 이 동네에 살고 싶다 고백했다. 그녀가 후계동으로 이사 온 후 인생 처음 따뜻함과 인간애를 느꼈기에 후계동은 그들에게 세상에 맞선 멋없는 방패가 되어주고 있었다.
극 중 지안과 동훈은 마주치지도 대화를 많이 하지도 않는다.
물끄러미 응시하고 조용히 바라본다.
생각한다. 상대에게 표현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닮았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에 익숙하고,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해관계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나 철학을 굽히지 않는 바보들이다.
죽을 것처럼 힘들어도 티 내고 싶어 하지 않고 버티는 데 익숙한 삶
누가 날 알아. 나도 걔를 좀 알 것 같고.
-좋아?
슬퍼
-왜?
나를 아는 게 슬퍼.
5화, 동훈과 기훈의 대사
그래서 서로가 신경 쓰인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다.
나를 닮은 그가 불쌍하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게 불쌍하다.
나만큼 죽을 것 같은 인생을 버티고 있다는 의미니까. 나처럼 슬퍼본 적 있다는 뜻이니까.
서로를 향한 위로는 사실 자신에 대한 위로이다.
내게 누군가 넌지시 건네주길 바라는 말을 한다.
어느 때보다 진심이다. 날 닮은 그 사람에게 하는 위로는 진심일 수밖에 없다.
네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네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모든 일이 그래. 항상 네가 먼저야.
옛날 일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이름대로 살아. 좋은 이름 두고 왜
-10화, 동훈의 대사
과거 기억에 고통받고 미리 실망하고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사는 지안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사실 지안을 향한 말은 동훈을 위한 말이기도 하다.
'남들 시선, 남들 얘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동훈이 가장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건 자신의 치부가 타인에게 알려지는 일 그래서 가족들이 낙담하고 실망하고 슬퍼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극중 지안은 동훈을 도청한다. 동훈의 약점을 잡기 위해 행했던 불법 행위가 역으로 동훈의 본질을 알게 한다.
현실에서 소름 끼치는 범죄가 드라마 안에서는 더없이 따뜻하고 인간적인 행위가 되어버린다.
공간과 시간의 제약 없이 그 사람을 모두 다 투명하게 듣는 일 그렇게 지안은 동훈을 듣고 있다.
보통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끝없이 듣기 때문이다.
비겁하고 나약한 순간, 눈 감고 외면하고 싶은 순간조차 자신을 대면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자신의 삶도 그러한데 타인의 삶을 무편집으로 모조리 알게 되면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이라도 미워진다.
그러나 지안이었기에 그리고 동훈이었기에 그 행위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된다.
힘든 순간, 삶을 놓고 싶은 순간에도 항상 그를 들을 수 있다.
일방적이지만 그에게 이어 있다. 그게 지안을 숨 쉬게 한다.
지금의 관계, 시공간을 뛰어넘어 동훈이란 사람을 마주 보게 된다.
동훈은 좋은 사람이다. 엄청. 괜찮은 사람이고 엄청.
그리고 자기가 좋은 사람인지 모른다. 마치 지안처럼.
걔가 떠나면서 한 말이 있어.아무것도 갖지 않는 인간이 돼보겠다고. 다들 평생을 뭘 가져보겠다고 고생고생하면서 '나는 어떤 인간이다'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아등바등 사는데 뭘 갖는 건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원하는 걸 갖는다고 해도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못 견디고, 무너지고.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 나를 지탱하는 기준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내 진정한 내력이 아닌 것 같고. 그냥, 다 아닌 것 같다고. 무의식중에 그놈 말에 동의하고 있었나 보지. 그래서 이런저런 스펙 나열된 이력서보다 달리기 하나가 훨씬 세 보였나 보지.
-8화 동훈의 대사
극중 동훈은 건축구조기술사이다. 건물이 외부 환경에 의해 무너지지 않게 공학적인 설계와 판단을 한다. 외력보다 내력이 강할 수 있도록 버티는 힘을 계산한다.지안을 만나기 전 동훈의 삶은 내력이 다해가고 있었다. 원래 튼튼하지 못해 흔들리는 내력으로 근근이 버티던 삶. 그럼에도 동훈은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무너져가는데도 좋은 사람이기에 지안은 힘주어 그가 좋은 사람이라 말한다. 엄청나게.
지안은 달리기가 특기인 내력이 무지막지하게 강한 사람, 보통 사람처럼 이미 몇 번을 허물어졌을 법한데 꿋꿋하게 꺾이지 않고 타인을 향한 사람, 마음의 문을 전부 닫고서도 좋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빈틈을 잊지 않은 따뜻한 사람. 그런데 그녀의 삶에는 외력이 너무나도 강하다. 내력이 강한 지안마저 무너지게 만들 만큼 누구 하나 도와줄 이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무너져도 이해가 갈 만큼 힘든 삶.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는 순간 서로의 내력은 강해진다. 삶을 살만해지고 외력은 견딜만한 성질로 바뀌어버린다.
흔들리던 두 삶이 만나 서로를 알아본 순간 그들은 다짐한다. 행복해지자고. 인생은 살만하다고.
또 태어나도 괜찮다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행복해지기로 한다.
표면적으로 가장 위태로워 보였던 건 지안이지만, 사실 한순간도 견딜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던 건 동훈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건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는 것. 그럼에도 누군가를 위해 끊임없이 마음을 주는 것. 좋은 사람을 위해 용기를 내는 것, 진심과 진심이 만났을 때 서로를 살리는 치유의 힘을 믿는다.
현실에서는 어쩌면 표현되기 어려운 따뜻한 인간미, 드라마라도 좋다.
지안과 동훈이 행복해져서 좋다.
지안과 동훈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후계동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 삶이 살만하게 느껴지는 이런 드라마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