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상태를 수식하는 단어 중 가장 두렵고도 끔찍했던 건 '무기력', 무기력이 찾아올 때마다 어찌할 바 몰랐다. 손을 놓고 있기에는 불안하고 한심하고, 그렇다고 녀석을 내쫓으려 애쓸수록 보람도 없이 오히려 덩치가 커지는 폭탄을 받아든 셈이 되었다. 무기력에 대처할 방법을 몰랐다. 무기력을 받아들이는 법도 극복하는 법도 몰라 스위치를 꺼놓는 듯 한구석에 치워버리고는 검은 천을 덧대 모르는 척했다.
부정적인 감정 역시 감정이다.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배우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기력만은 예외였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슬픔이 없인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걸 보며 유레카를 외쳤을 때도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워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슬픔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오는 고유의 역할이 분명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도 소용없었다. 우울, 슬픔, 불안, 공포, 분노는 위험을 안고 있긴 하나 저마다의 쓸모가 있다는 걸 고려해봐도 무기력은 언제나 배제되었다.
인생에서 최대한 피해야 할 것, 벗어나야 할 것, 무기력은 긍정의 함유가 없는 순도 100%의 부정적 단어였다. 어느 상황에 대입하든 시야를 넓혀도 시각을 바꿔도 효용성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문질러도 낙인이 지워지지 않았다. 변명할 수 없이 나쁜 상태. 함정에 빠졌단 말 외 수식어는 붙일 수 없다. 나는 무기력할 때 나를 가장 미워했다.
모든 감정이 그러하듯 무기력도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시기에 알 수 없는 주기로 예고 없이 순환했다. 다른 감정은 몰라도 무기력만큼은 손님으로 기꺼이 맞이할 수가 없었다. 두려웠다. 아는 척하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며칠 전에도 무기력은 다시 찾아왔고, 누구에게도 내가 무기력하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도 몰래 무기력에 시달리며 약간의 죄책감과 그로 인한 실망감을 동시에 느꼈다. 방치 외에 답은 없었고, 무기력을 통제하는 방법을 죽을 때까지 나는 배우지 못할 것이다. 옅은 낭패감이 날 비웃고 있었다.
문득 과거에도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번 역시 정신을 차려보니 무기력은 저절로 사라졌었다. 어느 때보다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깨어나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과거와 달리 그 순간을 포착했다. 무기력을 미뤄두지 않고 옆에 보고 관찰하고 있던 셈이다. 그래봤자 내가 왜 무기력해졌고 어떻게 그 무기력을 사라지게 만든 건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깨달음에 도달했다. 세상에! 생각해보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자신에 대한 발견 혹은 인생에 대해 깨달을 때마다 늘 깊은 무기력에서 막 깨어난 시점이잖아! 내가 진화했다고 여기는 순간의 바로 전 단계에는 공교롭게도 무기력에 제대로 시달렸다. 예외는 없었다.
무기력한 이후 찾아오는 홀가분한 상태의 쾌감의 강도가 비교적 높아지기 때문이 아니었다. 평생 인생에서 느끼지 않고 살아갈 방도는 없으니까 억지웃음 지으며 친한 척 자기기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아니었다. 눈속임도 아니고 타협도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실질적으로 무기력이 인생에서 기능하는 존재론적 이유가 있었다. 무기력을 겪고 벗어날 때마다 이전 세계는 사라졌다. 불가역적으로 하나씩 업그레이드되어 삶에 아로새겨졌다. 모순적이게도 그때마다 파편들이 그림이 되고 점들이 연결되고 목적의식이 분명해지고 믿음의 점성이 커졌다.
죽은 채로 영원히 무기력하게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이해하니 어떤 사람보다도 더 무기력이 절실했다. 무기력이 작동해야만 했다. 한 번 겪은 고통이나 실수 문제가 되풀이되면 결코 이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극복할 수 없기에 싫어도 한 차원 나아가야 한다. 다른 방식을 적용해 변화해야 한다. 살고 싶다면 업그레이드되어야 하고, 그 피치 못할 역할을 늘 무기력이 해낸 거다.
무기력은 더는 괴물이 아니다. 골칫거리도 액운의 상징도 무능력의 이름표도 아니다. 무기력이 아주 중요한 동반자가 되자 신기하게도 질문이 바뀐다. 내 삶에서 또 어떤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되는 거지? 삶을 혹은 나를 또 어떻게 변화시키려고 이러는 거지? 나는 이번에 어떤 진화를 맞이하려 이러는 거지?
이제 나는 무기력해지면 오히려 설렌다. 무기력이 찾아오는 순간마저 설렌다.
2021.02.07 Original posting from fgomul steem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