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결과가 아니라 시작이 되면 모든 게 변화된다.
이제는 화가 나지 않는다. 아니, 이제는 화가 나는 자리에 채워야 할 게 이해와 열정 여유와 미소라는 걸 안다. 그건 내 화가 나빠서도 자격이 없어서도 아니다. 화가 나면 평판이 나빠지거나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도 아니다. 화가 나는 건 그저 더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이니 조금 더 예민하고 부드럽게 화를 응대하는 원리를 익히면 된다.
과거에는 화날 일이 많았다. 많은 걸 원하는데도 원하지 못하게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많은 걸 원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원하는 게 없다고 오랫동안 자신을 속여왔다. 속이는 데 익숙해서 나조차 그 모든 욕망과 욕구를 까먹어버려서 답답했기 때문이다. 억지로 닫아 놓은 에너지는 언젠가 분출되고 만다. 평생의 압력을 견디고 밀어내는 힘은 화산처럼 폭발해서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고 말한다. ‘이제 나를 보라고, 나를 원한다고 말하라고. 내가 여기 있는 걸 더 이상 부정하지 말라고.’ 그조차 외면하면 그 화는 결국 나를 파멸시키고 산산조각 낼 것이다.
원하는 게 없는 사람은 양보하고 사는 데 익숙해진다. 아니, 양보라 믿었지만 사실 그건 양보가 아닌 제약이다. 이만큼 나는 나를 억누르고 참고 사니, 당신도 이만큼 해주는 게 배려라는 무언의 압박 혹은 협박을 은연중에 품고 산다. 진정한 양보, 배려, 사랑에 대가는 없지만, 분노를 보상하기 위한 양보는 엄격한 감시 아래 모두 따라야 하는 규칙이 된다. 이만큼 견디고 있다는 걸 알아줘. 가끔은 눈물로 호소하고, 선을 넘어가는 자들에게는 화를 낸다. 화가 나는 마음에는 규칙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규의 속삭임이 숨어 있다.
원하는 게 없는 사람은 없다. 아니 원해본 적 없이 원하는 게 없어질 수는 없다. 그렇게 노래방 반주처럼 건너뛰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원하지 않으려면 원하고 원하고 또 원해야 한다. 모든 걸 원하고 모든 걸 가져본 후에야 진정 원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이미 다 가지고 있고, 그걸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이고 그건 아무도 빼앗지도 영원히 사라지지도 않을 절댓값이기에 원하는 마음은 가라앉는다. 그 과정을 거치며 원하지 않게 된 사람과 원하는 마음을 가로막아 원하지 않는 줄 착각하는 사람이 같을 리 없다.
이제는 맥락에 벗어난 말로 다른 주제를 꺼내는 사람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제는 나와 있을 때 내내 딴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제는 그 사람이 어떤 눈으로 날 바라보고 어떤 의미로 날 치환해도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하는 사람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제는 과분하게 운이 좋아 보이는 사람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제는 말로만 사는 사람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제는 세상이 엉터리고 우리는 곧 망할 거고 너도나도 가식이라고 저주를 퍼붓는 사람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틀렸다고 다른 사람이 되라는 걱정과 조언을 하는 사람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제는 서투른 실수를 해도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제는 엄마가 먹지 못할 반찬을 잔뜩 안겨주어도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제는 다시 쿠키 집에 가서 또 한 번 쿠키를 사야 한다고 해도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제는 낯선 상황에 할 줄 모르는 일을 떠맡게 되어도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제는 화가 나서 화를 내는 사람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전에 화가 나는 이유를 몰라 화는 변덕스럽고 다혈질인 성미라고 나를 분류하는 게 최선이었다. 인지하지 않아도 울컥 몰아치는 심장으로 몰리는 혈류의 빠른 속도를 느끼며 이건 선택이 아닌 본능이라 확신했다. 상황에 익숙해져 대응 시나리오를 배워 배우처럼 연기를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내가 미웠다. 사회 생활할 줄 모르는 미성숙한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니, 얼른 어른이 되라고 요구했다.
원해야 한다. 원하고 싶다면 화와 두려움에 진지하게 묻고 대답을 들어야 한다.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은 반대로 말하고 처음에는 입을 다물고 심지어 모욕을 퍼붓는다. 웃기지 말라고. 그런 말랑한 마음은 집어치우라고. 인내심을 지니고 친절하게 이야기하다 보면 알게 된다. 콕 가시가 박힌 지점이 보인다. 화가 많이 나고 좌절했던 지점이 정확히 그만큼 원하는 시작점이 된다.
화가 결과가 아니라 시작이 되면 모든 게 변화된다. 화는 더 이상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고 송두리째 나를 잡아먹지도 못한다. 그저 솔직하고 다소 거친 언어를 구사하는 활기 넘치는 가이드일 뿐이다. 화는 언제나 나를 도와준다. 내가 다시 나를 기만하고 원하는 게 없다고 익숙한 거짓말을 건넬 때, 아직 넌 더 원하는 게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화가 아니라 원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화를 억누르거나 없애거나 비난하는 게 아니라 화를 통해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을 찾는 게 비밀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원했다. 내가 되어 나로 사는 거, 나를 표현하는 거. 자유롭고, 사랑하며 삶을 살기. 아직 만나지 못한 모든 나를 하나씩 다 만나기. 웃고 춤추고 아름다운 걸 보고 듣기. 원하는 목록을 나열하다 보면 점점 늘어난다.
그러나 결국 원하는 건 단 하나이다. 이 모든 걸 얻기 위해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여정이란 걸 믿는 것이다. 이 모든 걸 하고 있다는 걸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걸 진정 아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화가 날 필요가 없다는 걸 내 화도 알게 된다. 그래서 더 이상 화에게도 화가 나지 않는다. 화가 나는 자리에 두는 건 늘 하나이다. 내가 찾아낸 영혼의 자리, 영원히 흔들림 없이 편견 없이 오로지 사랑만으로 그저 온전한 존재로서 나를 바라보고 기억해주는 너와의 연결.
이제 화는 농담의 소재로 기억이란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그게 삶에 찾아와도 반갑게 맞이할 거다. 오랜만이네. 아직 원하는 게 있다니 기뻐!
2022년 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