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상태가 있다면 그저 그 상태가 되면 된다.
존재는 0과 1, 이진법의 체계라서 존재는 존재를 갈망할 수 없다. 조금 더 강렬하게 존재하거나 조금 더 가볍게 존재하거나 반만 존재하는 건 가능하지 않다. 존재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존재는 존재에 관해 완전히 잊었다가 그저 존재하지 않기 만을 바랄 수 있다. 그건 단번 주어지는 영구한 전환이다. 존재가 비존재 했다 다시 존재가 될 수는 없다. 1은 0이 되지만 0은 1이 될 수 없다. 2022년 아직은 비존재가 말하거나 비존재가 다시 존재가 되는 법이 세간에 목격된 적 없다.
존재를 자각한 후 상태를 알게 된다. 상태를 보려면 대상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아주 먼 거리에서 타인을 바라보면 상태를 쉽게 알아챌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만, 세부적 정확성이 떨어진다. 많은 경우 오인되지만, 살아가는 데 큰 불편을 초래하지 않기에 다들 그럭저럭 오해하고 산다.
반면 주체가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는 일에는 품이 든다. 주체는 객체를 바라보듯이 조금 떨어져 과거의 데이터를 끌어와 면밀히 분석한다. 지금 상태를 상세하고 정확한 확률로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거나 관습적인 일이 아니기에 에너지가 많이 드는 비효율적인 행위이다. 상태를 바라보게 되면 주체는 존재로서 존재를 그제야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비존재를 말하지 않고도 존재가 거기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상태를 알아채는 건 존재의 특권이며 존재에게 다가가는 유일하고 정교한 소통 방식이란 것을 말이다.
종종 상태는 외부에서 주어지거나 조건 짓는 것으로 오인된다. 그때 주체는 상태를 갈망하는 오류에 빠진다. 그러나 상태는 그저 존재의 반영일 뿐이다. 존재를 구할 필요 없는 것처럼, 아니 존재를 일시 정지하거나 철회할 수 없는 것처럼 상태도 마찬가지이다. 상태는 그저 그 상태가 되는 것 이외에 다른 동사를 접목할 수 없다. 상태가 되길 갈망할 필요도 상태를 저주할 필요도 상태가 되길 기다릴 필요도 없다.
스스로가 존재임을 잊고 살 적엔 오로지 상태만을 갈망했다. 상태는 조건이나 물질, 타인이나 세계보다도 공고하고 장기적이며 완전해 보였다. 일관적이고 만족스러운 행동과 선택의 준거 기준이 되기에 타당해 보였다. 여러 상태가 반복된다. 한 상태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의 존재감을 보여주고는 곧이어 다른 상태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나를 다른 존재가 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건 하나의 마법이었다. 기분 좋은 상태나 사랑에 빠진 상태, 상대방에게 따뜻한 애정이 뿜어 나오는, 활기차고 용기가 샘솟는 상태 혹은 평온하고 차분한 상태 아니 흔하게는 행복한 상태가 되게 해달라고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기도했다. 나의 소원은 늘 하나뿐이었다. 기분 좋고 맘에 들고 안정된 상태가 되게 해달라는 그 욕망 하나뿐.
존재는 상태를 경험한다. 아니, 존재가 경험하면 상태는 깨어난다. 존재에게 생명이 있는 한 그 존재는 특정 상태에 있다. 존재는 생명이 있으니 언제나 상태를 지닌다. 상태는 그저 존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니 존재를 갈망할 수 없다면 상태 역시 갈망할 수 없다.
실패한 원인은 상태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존재는 하나이고 완전하며 상태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상태가 되기 위한 기도, 노력, 갈망, 애원은 공허한 시도에 불과하다. 주체가 존재한단 이유로 그가 알고, 겪고, 알게 될 모든 상태는 날 때부터 이미 가지고 태어난 특성이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길 갈망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상태도 갈망할 필요 없다. 그건 이미 존재에 기록되어 있다.
갈망은 결핍의 욕구에서 태어난다. 차라리 가지고 싶은 특정 물질, 만나고 싶은 특정 사람, 속하고 싶은 특정 커뮤니티, 놓치고 싶지 않은 특정 기회, 얻고 싶은 특정 권한, 이루고 싶은 특정 부, 특정 성취, 인정받고 싶은 특정 정체성을 갈망하는 편이 한결 현명하고 수월하다.
원하는 상태가 있다면 그저 그 상태가 되면 된다. 갈망할 필요 없이 그 모든 건 주체 안에 생득적으로 존재하기에 밖에서 구하거나 누군가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갈망에 묻는다. 그 상태를 만들 수 있는 순간적인 외부의 무언가를 달라고. 무얼 원해? 솔직하게 눈치 보지 말고 원하는 걸 찾는다. 도덕적인 기준과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은 내려둔 채, 밑바닥까지 주저 없이 내려간다. 외부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데는 어떤 오류가 없다. 그 사건과 행위의 결과로서 상태는 깨어나고 그 상태를 지켜보며 존재는 존재를 깨닫게 될 뿐이다. 그 모든 욕망은 존재가 되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태를 갈망한다면, 오로지 원하고 갖고 싶은 게 다른 그 무언가가 아닌 상태의 영역이라면,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존재하길 갈구한다면 그 존재는 존재를 넘어서야 한다. 존재 바깥 희미하고 불확실한 무언가를 바라볼 때까지 갈망은 멈추지 않는다. 존재는 비존재 상태가 되는 법을 배운다. 그것 외에 갈망의 오류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기에. 비존재 상태에서 주체는 객체처럼 필연적으로 힘들이지 않고 늘 상태를 바라보게 된다. 냉정한 3자의 눈을 지니고 자기 몸과 마음 영혼을 내준다. 조금의 오차 없이 정확하고 전인적인 통합을 이룬다. 그 모든 상태를 편견 없이 숙지하고 완전히 알게 된다. 동요도 판단도 두려움도 벗어난 자리에서. 비로소 갈망은 해소된다. 그 모든 상태는 역시나 단지 존재의 다른 이름뿐이라는 걸 확인한다. 존재가 산다는 건 그저 상태에 있는 거란 단순한 사실을 경험함으로써.
2022년 4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