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관성의 비일관성

by 스텔라

어린 시절에는 일관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알고리즘처럼 상황과 변숫값이 주어지면 누가 구해도 같은 결론이 나올 수 있을 만큼 자신의 가치와 태도를 중시해서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변화하지 않는 건 변화한다는 사실뿐이라는 불확실성의 세상에서 적어도 나만큼은 확실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 줘서 안심되고 믿을 수 있는, 일관적인 사람. 그러니 그 시절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과 감정을 볼 때마다 어찌나 괴롭고 실망스러웠는지. 내가 고작 이런 사람이라니! 자신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우유부단한 사람이라니. 내가 알지 못한 한 부분이 튀어 오르면 손사래 치기 바빴다. 이건 진정한 내가 아니야. 원래 나는 이렇지 않아.


시간이 지나 나는 로봇도 알고리즘도 아닌 사람이기에, 무릇 겨우 나라서가 아니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도 사람은 늘 변화하며, 자아란 고정된 실체를 갖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된 이후에도 일관성은 포기하는 건 타협 혹은 체념에 더 가까웠다. 여전히 일관성을 원하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괴롭히기를 그만두며 양보해버린 강요된 선택지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때 내가 믿었던 절대적 일관성이 사실은 비일관성을 통해서만 확보된다는 역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사람은 현실적으로도 일관적일 수 있다. 다만, 내가 생각해왔던 의미와 틀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시야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원칙은 일관적일 수 있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산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한다.’는 대 원칙에 따라 행동과 말의 일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


과거엔 특정한 행동이 어떠한 속성과 일대일 대응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선행은 사랑이고,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단절은 두려움이란 속성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게 사람에 따라서는 달라질 수 있으나 대체로 한 사람에 관해서는 어떤 행동과 말을 하는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완전히 같은 상황의 한 사람의 같은 행동과 말이라도 어떤 의도와 목적인지에 따라 속성이 완전히 달라진다. 만약 내가 기꺼이 누군가의 아픔이나 고통에 인류애를 느끼고 그 사람이 잘 되길 바라는 기쁨의 마음으로 선행을 베푼다면 그건 선이고 사랑의 행위이다. 그러나 자신이 설정해 둔 선하다는 자아개념이 망가질까 두렵거나 사회적 압박에 은근히 시달리며 보상하기 위해 선행을 해야 한다는 충동이 든다면, 차라리 선행을 하지 않는 게 선이다. 두려움을 대면하고 자신을 속이지 않게 되어 저항감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거부당할까 봐 먼저 마음의 빗장을 잠그고, 거리를 두는 단절은 도망이고 회피이며 바람직하지 않지만, 같은 상황에서 단절이라도 자발적으로 혼자만의 고립된 시간을 통해 자기 내면과 대화하고 치유하고 에너지를 얻는 시간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도움이 되는 행위이다.



그러니 일관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무조건 좋은 일이나 대상이란 건 없고, 해선 안 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가 정해진 것도 아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언어 너머 개별적이고 진실한 그 사람 마음의 소리에 따라 원칙도 선도 정해질 수 있다. 누구인가 무엇인지 보다 중요한 건 왜이고, 거기에 담긴 에너지의 의미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비일관적이고 변덕스럽게 보이고 표면적인 행동만 보자면 모든 게 상대적이라서 아무 의미 없어 보일 수 있지만, 개인의 관점에서는 자신이 선택하고 싶은 원칙에 따라 일관적으로 사는 삶이 가능하다.


일관적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솔직해야 하고, 선택을 앞에 두고 이 행위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 누구도 대신 답해줄 수 없이 그건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비일관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변화 속 자기 행동 안에 굳건한 신념을 기준으로 선택해간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을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삶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2022년 3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