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라이징하는 방법
예전과 다르게 이젠 많은 그림책 작가들이 수작업 대신 간편한 디지털 작업을 더 선호한다. 신티크 같은 비싼 액정태블릿이 많이 보급화되고, 아이패드로 언제든 어디서든 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화면으로 바로 그림을 그리는 게 너무나 당연한 세상에 살고 있다.
다시 수작업으로
하지만 최근 AI그림에 대한 여러 담론이 나오면서, 오히려 난 수작업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 작년에 끝낸 수작업 그림책 The Snowmansion을 작업하면서, 수작업의 어려움을 느꼈지만 한편 더 수작업 기량을 높이고 싶다는 욕심도 들었다! 작업 공간도 많이 차지하고, 후보정 작업도 많이 걸려서 한동안 수작업 그림을 접었다. 하지만 잘 그리기 쉽지 않은 만큼, 내 손끝으로 완성된 그림책을 보면 디지털 그림들보다 더 뿌듯하고 더 보람이 느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원화, 특히 해외로 보내야 하는 그림책 원화들은 반드시 디지털 이미지로 바꿔서 보내야 한다. 아무리 출판사가 원화 작업물을 받아준다손 쳐도, 구겨지지 않게 신경 써서 포장한 다음 비싼 EMS로 보내는 것 자체가 큰 품이 든다. 무엇보다 유류비가 비싼 요즘, 큰 해외배송비는 이루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손작업을 포기해야 할까? 원화작업을 디지털라이징 하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여러 그림책 작업을 하면서 다양하게 시도해 보았고, 더러는 좋았으며 더러는 다소 아쉬웠다. 그중 가장 보편적인 방법부터 설명해보려고 한다.
1. 평판 스캐닝 (Flatbed Scanning)
그냥 집에서 복합기 스캐너나 전문 스캐너로 스캔하는 방법이다. 가장 가성비가 좋고 편하지만, 전문 작업을 위해선 복합기보다는 Epson이나 Canon에서 나온 사진 전문 스캐너를 사는 게 좋다. 이런 전문 스캐너조차 요즘에는 매우 저렴하게 나온다.
A4 사이즈가 보편적이라서 A4 이상의 사이즈를 스캔하려면 따로 A3 스캐너를 사야 한다. 아니면 A4 스캐너에 조각조각 나눠서 스캔해서 따로 합쳐야 한다. 보통 포토샵이나 라이트룸(Lightroom)을 이용해서 합치는데, Ai기술이 발전해서 요즘엔 꽤 그럴듯하게 이음새 없이 감쪽처럼 합쳐준다. 이 부분은 나중에 정리해서 글을 올려야 될 것 같다.
단점은 평판 스캐닝이라서, 종이의 미세한 요철이나 살짝 굴곡 있는 그림 부분을 아예 납작하게 스캔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미세한 디테일이나 색감 차이가 존재해서, 아무래도 원화 그대로의 느낌과 컬러를 온전히 전달하기 어렵다. 본래 다양했던 원화의 색감이 다소 뭉개지고 단순화되기 쉽다.
또 아무리 고해상도로 스캐닝을 받아도, 비트맵 이미지를 돋보기로 뜯어보면 뭉개진 자국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난 가능한 600 dpi 이상으로 스캐닝을 한 다음, 포토샵에서 살짝 Sharpen 필터를 추가해서 이미지를 더 날카롭게 보정한다. 그래도 드럼 스캔보다는 훨씬 못 미치는 게 아쉽다.
평판 스캔을 잘하려면 최대한 그림을 평평하게 스캔해야 되는데, 그림 위에 두꺼운 하드커버 화보집 등을 두어 권 올려놓고 스캔하는 게 좋다. 아니면 전날에 그림 원화 위에 깨끗한 갱지를 놓고, 그 위에 무거운 책을 올려서 미리 평평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2. 사진 스튜디오 촬영 (Photography)
두 번째로는 작업실에서, 혹은 사진 전문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는 방법이다.
사진은 스캐닝하는 것보다 훨씬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다. 좋은 카메라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좌우에 큰 촬영 전문 조명이 필요하고 타이머와 리모컨 기능이 필요하다. 좋은 카메라가 있다 하더라도, 카메라는 스캐너와 다르게 시야 왜곡이 일어난다. 우리가 폰카로 셀카를 찍거나 누군가를 찍을 때, 배율에 따라 왜곡이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집에서 촬영하는 것보다, 모든 장비가 갖추어진 전문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게 좋다. 원화를 사진으로 찍으려면 광량이 중요해서, 밝고 큰 사진용 조명이 좌우에서 45도 각도로 균일하게 그림을 비춰야 한다. 그리고 적절한 거리에서 삼각대를 단 카메라를 놓고, 조명과 카메라가 연결이 된 타이머와 리모컨을 가지고 좀 더 떨어져서 사진을 찍게 된다.
시간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작업은 삼각대 수평을 맞추는 것이다. 또한 반질반질한 바니쉬로 캔버스를 코팅한 경우, 빛 반사 때문에 제대로 찍히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사진 작업은 입체 작품, 혹은 수채화나 파스텔같이 빛 반사에서 자유로운 작품이나 너무 커서 스캔을 하지 못하는 대형 작품에 특화되어 있다.
사진 촬영은 잘만 촬영하면 그림의 미세한 요철과 디테일까지 잘 나타나기 때문에, 콜라주 같은 다양한 재료를 써서 붙인 그림들도 잘 어울린다. 단, 근처에서 인물 촬영만 하는 사진관이 아닌, 오랫동안 미술 도록이나 작가들의 작품을 촬영한 경험이 있는 미술 전문 스튜디오에서 하는 게 좋다. 돈 아낀다고 집에서 똑딱이로 촬영하지 말고 좀 더 돈을 주더라도 제대로 된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하자.
3. 드럼 스캔(Drum Scanning)
가장 전문적이고 돈이 드는 작업은 역시 드럼 스캐닝이다. 말 그대로, Drum 통처럼 생긴 투명관에 원화를 말아서 고속으로 회전시켜서 스캔하는 방법이다.
십여 년 전과는 다르게, 이젠 수요가 많이 없어져서 드럼 스캔을 하는 곳은 서울에서 2-3곳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잡지나 책 등에 들어갈 초 고화질 사진, 그림 스캐닝은 드럼 스캔밖에 방법이 없기 때문에 아직도 꾸준히 수요가 있다. 드럼 스캐너는 복잡한 선들과 조작 버튼이 있는, 그랜드 피아노 보다도 긴 무거운 기계라서 집에서 따로 놓고 쓰기 힘든 스캐너다! 업체마다 다르지만, 내가 맡겼던 곳의 A4사이즈 스캐닝비는 300 dpi 기준으로 대략 15000~17000원이었다. 원하는 해상도가 올라갈수록 가격이 비싸다.
하이엔드 작업에 가장 최적화된 방법인데, 비싼 만큼 이미지 퀄리티가 정말 좋다! 심지어 컬러링 하기 전에 미세하게 남긴 밑그림 스케치나, 실수해서 지우개로 지운 흔적까지 모두 스캔된다. 기본적으로 CMYK 모드로 스캐닝되며, 평판 스캐너와는 다르게 한 장 한 장 스캔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컬러링 작업을 끝내는 대로 모아서 10-20장 원화를 한꺼번에 사장님에게 맡긴다.
드럼 스캔의 장점은 정확성과 디테일인데, 오히려 이 디테일이 너무 심해서 그림 자체가 아주 날카롭게 디지털라이징 될 수 있다. 한 톨 먼지까지 정확하게 스캐닝되기 때문에, 사장님에게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 느낌을 정리해서 말씀드리는 게 좋다. 그리고 투명 드럼통에 그림을 말아서 넣기 때문에, 너무 두꺼운 그림이나 보호제를 뿌리지 않은 파스텔 그림 등은 손상될 가능성이 있다. 드럼 스캔 스튜디오에 가기 전에, 사장님께 미리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서 자신이 스캐닝받을 그림의 종류와 사이즈, 작업 재료 등을 미리 전달하고 견적을 받는 걸 추천한다.
그럼, 어떤 게 최선일까?
그림책을 작업하는 데 있어서 뭐가 최선일까? 정답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집에서 좋은 평판 스캐너로 스캔해서 포토샵으로 후보정하는 작가도 있고, 돈을 주더라도 무조건 드럼 스캔을 활용하는 작가도 있을 것이다.
사실, 아직도 많은 작가들이 집에서 간단하게 스캐닝한다. 어차피 포토샵으로 원화와 비슷하게 보정할 수 있고, 돈도 아낄 수 있으니까. 한 페이지에 15000원이 넘는 드럼 스캔을 쓰면, 그림책 40페이지를 기준으로 최소 60만 원을 스캐닝 비용으로 써야 한다! 사진 스튜디오 비용도 드럼 스캔과 비슷하다.
그래서 여러 방법을 상황에 따라, 또 그림의 재료에 따라 적절하게 쓰는 게 좋다. 전문 도록이나 큰 도판의 그림책의 경우 드럼 스캔을 쓰고, 습작이나 흑백 그림같이 컬러감이 중요하지 않은 그림들은 집에서 간단하게 스캔해도 된다! 혹은 표지같이 중요한 작업물 몇 개만 드럼 스캔을 맡기고, 나머지를 집에서 스캐닝하는 방법도 있다. 단, 무엇이든 돈을 들인 만큼 만족도가 높은 건 어쩔 수 없다.
무엇보다 그림책은 아이들이 한 장 한 장 꼼꼼히 뜯어보는 매체이다. 좋은 퀄리티를 위해서는 가끔은 과감해져도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