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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이 여러 번 반복되면 남는 건 낙인이다

경기도에서 서울까지 신입사원이 살아남는 법

by 서이담


헉헉 소리를 내면 엘리베이터를 탔다. 59분에서 00시로 바뀌는 사이 마라토너처럼 무리 지어 계단을 뛴다. 지문을 찍는 순간 희비가 교차된다. 9시 00분에서 01분으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경기도에 사는 내게 서울은 가깝고도 먼 거리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출퇴근으로 버려지는 시간이 조금 아쉽다고 생각된다.


다른 회사로 이직을 여러 번 하면서 다시금 느꼈던 건 경기도에서 출발하는 나에게는 강남이든 종로든, 회사만 도착하면 다 똑같은 서울일 뿐이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싣고 출근하다 보니 ‘1분 일찍’과 ‘1분 늦게’는 전혀 다른 의미라는 걸 깨닫게 됐다.

일찍 출발한다고 했는데 버스에서 밀려 지하철을 늦게 타는 경우도 있었고, 역까지는 잘 왔는데 지하철이 연착되기도 했다. 대중교통은 큰 변수가 존재했다. 계절이 바뀔 때 혹은 날씨가 바뀔 때는 더 심했다. 비나 눈이 올 때면 삼십 분은 더 일찍 출발해야 했다.


아침마다 버스와 지하철은 내 운명을 쥐고 있었다. 환승에 단 몇 분 차이가 나도 회사에서 내 모습은 전혀 달라졌다.

지각을 하지 않는 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내가 생각한 시간보다 더 일찍 출발하면 된다. 간단하지 않은가? 회사에서 지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월급이 깎이지는 않았다. 대신 경영지원과에 기록이 남으니 연봉협상이나 직원 평가에 불리할 수밖에 없다. 회사 사람들에게는 ‘지각’이 시간을 지키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잣대가 되었다. 그러니까 지각은 숫자가 아니라 내 인상에 남는 낙인이었다.


“저 과장님은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분이야”

J 사수가 귓가를 스치듯 조용히 말했다.

업무보다는 지각 많이 하는 과장님이라는 수식어를 단 분. 다른 사람에게 저렇게 불리는 것을 그도 알까.



나는 자주 지각하지는 않았지만 늘 외줄을 타듯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대며 자리에 앉으면 J 사수의 시선이 느껴졌다. 물론 그녀도 지각한 적이 꽤 있었다. 회사는 일도 잘해야 되지만 성실해야 한다. 성실함을 알 수 있는 제일 쉬운 척도가 바로 근태다.

그러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를 다짐하고도 준비하다 보면 늘 비슷한 시간에 출발했다.


캡처1.JPG


다행히 지하철 역사에서 발급해 주는 연착증명서는 몇 번이 나 나를 구해주었다. 종이에 찍힌 도장이 마치 방패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모든 지각을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정말 늦은 날에는 핑계를 대느라 머릿속이 하얘졌다. 떨리고 긴장됐는지 도둑이 제발 저리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느 날부터 꼼수가 생겼다.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날에는 눈을 감고 선잠을 잤다. 투명 창 너머의 풍경을 보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있는 편이 나았다. 버스에서도 눈을 감고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려고 노력했다. 사실은 눈을 감을 채 버텼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몸은 흔들리고 다리는 아파왔지만 그 순간만큼은 “조금이라도 자야 오늘을 버틸 수 있다”라는 마음뿐이었다.


꾸벅꾸벅 졸다 눈을 뜨면 오늘도 겨우 시간을 지켜낸 하루가 시작되곤 했다.


덕분에 나는 수년이 지난 지금 시간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됐다. 면접, 미팅, 지인과의 밥 약속 등 장소와 시간이 정해지면 십 분에서 삼십 분 내지는 일찍 가 있는다. 지인과의 모임에서는 항상 일찍 가 있어 상대방이 미안해할 때도 있어 일부러 약속 장소 근처를 몇 바퀴 돌기도 했다. 연차가 쌓이고 직급이 올라 다양한 일 들로 사람들을 만나며 깨달았다.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더 신뢰가 간다는 걸.


몇 분이라는 시간이 나라는 사람의 인상을 만들기도 신뢰를 갉아먹기도 한다는 것을.


연착증명서로는 증명할 수 없는 것, 변명으로는 감출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지금에서야 감히 말할 수 있다. 회사에서 시간을 지킨다는 건 시계를 맞추는 일이 아니라, 나를 증명하는 일이라는 것을. 버스와 지하철이 나를 흔들던 지나간 아침들 속, 반복되는 회사 생활에서 얻은 건 분명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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