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 줄 때

by 최물결

어릴 적 할머니 손에 이끌려 유치원과 학원을 다녔다. 다른 엄마들 틈에 있는 할머니가 가끔은 어색해 보일만도 했다. 하지만 내겐 할머니 손을 잡고 유치원 등하교를 가는 길이 익숙했다. 할머니는 회사 간 엄마를 대신해 나를 돌봐줬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유치원 셔틀 통학버스를 타러 가는 시간부터 데리러 오는 시간까지……. 할머니가 나를 챙겨주는 손길은 투박했지만 그 시간만큼은 항상 다정한 엄마가 돼줬다.

할머니는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매일 유치원 오후반이 있는 날이면 도시락을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뜨끈뜨끈한 밥과 여러 가지 반찬을 싸서 식지 않도록 보온 통에 넣어 쌌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선생님들 도시락을 하나씩 더 싸곤 했다. 선생님들 도시락도 손녀가 먹는 것처럼 예쁜 도시락 통에 반찬을 맛깔나게 담아 옮겨 담았다. 할머니의 도시락 메뉴는 내 키가 한 뼘 한 뼘 자라나는 것처럼 다양해졌다. 어떤 날은 흰쌀밥 또 어떤 날은 김치볶음밥, 또 다른 날은 오므라이스를 싸주셨다. 꼭 우리 아이 잘 봐주십시오 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전해지는 포근한 온기가 선생님들에게 전해졌을까. 선생님은 할머니의 따뜻한 도시락을 기억해주고 내 이름을 기억해줬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혹시나 우산은 안 가지고 왔나 한번 더 물어봐줬고 할머니의 안부를 챙기는 선생님들이 많아졌다. 처음에 멀리서 들리는 말들은 할머니가 데려다주는 애 정도였지만 나중에 할머니와 나는 유치원 내에서, 선생님도 챙길 줄 아는 마음 따뜻한 할머니와 손녀가 돼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스승의 날에 할머니가 아는 속옷가게에 들린 적이 있다. 선생님께 드릴 속옷을 사려고 했는데 속옷가게 아주머니와 친해 팬티를 세트로 구입한 적이 있다. 어린 유치원생이었던 나는 창피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 할머니 손을 끌며 얼른 가자고 한 기억이 있다. 꼭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소소한 먹을거리에 이야기를 덤으로 얹어주며 오고 가던 정 있던 모습이 사진첩처럼 스쳐 지나간다. 내 어린 시절과 할머니의 육십 대 기억이 맞닿아 있다.





얼마 전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 중에 삼십 년 전 내 모습 같은 아이를 봤다. 초등학교 2학년 S라는 여자 아이였다. 눈이 나빠서 한 번은 안경을 놓고 학원에 온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가 직접 빨간 뿔테의 안경을 가져다주며 먼발치에서 손녀 S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오늘은 제가 좀 늦을 수도 있어서 S가 좋아하는 딸기 크림빵 주시고요. 선생님들 항상 수고하십니다. 나눠 드세요”

S의 할머니는 좋아하는 딸기 크림빵을 쉬는 시간에 챙겨 먹게 해 달라는 말과 함께 선생님들의 빵을 여러 번 챙겨주셨다. 단순히 빵을 줘서 기억되는 마음보다 손녀를 생각하고 선생님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가슴으로 훅 와 닿았다. 30년 전 그때의 내 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요즘은 내 아이 잘 봐주십시오라고 마음으로 전하는 말들보다는 당연히 돈을 냈으니 선생님들이 잘해야 될 의무적인 것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내가 직접 사회에 나가 일을 해보니 얼마나 선생님도, 학원도 힘든 건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의 이름쯤은 전산화가 잘 돼있어 들어오는 순서대로 찍히기도 해서 바로바로 보여서 말해 줄 수도 있는 세상이 왔다. 학원 데스크 선생님으로 불리는 나는 학원의 잡다한 행정업무를 하면서도 아이들이 학원 수업을 들어가기 전까지 책을 보거나 앉아 있을 수 있게 지도한다. 또 가끔은 허심탄회하게 내게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해주기도 한다. 물론 부모님들의 컴플레인들도 요청사항도 매일매일 그 종류가 다양하다. 어떤 날은 정신없이 바쁜 날도 있고, 학원 규정을 벗어나는 것을 우기며 되게 해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요청사항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기도 한다.

S할머니는 항상 S를 데리러 올 때 나와 밝게 인사를 해준다. S는 어릴 적 내 모습과 비슷해서 더 눈길이 가는 아이다. 살갑게 오지도 않고 책을 보러 나올 때면 눈치를 본다. 낯을 많이 가려서 나서는 법도 없다. 아마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평범한 S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S가 이제 먼저 살갑게 영어학원에서 시험 본 얘기를 내게 한다. 가방에 달린 원숭이 고리를 가지고 해외에 나갔다 온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이제는 쑥스러움도 없다. 나는 S를 보며 싱긋 웃는다.

아이들은 많지만 아이들의 모습과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간직하려고 한다. 각자가 가진 이야기들이 이름과 함께 기억될 수 있도록. 그리고 불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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