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의 반항적인 정신이 담겨있는 City Lights 서점
요즘 샌프란시스코가 몰락해 간다는 뉴스를 많이 접하게 된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재택근무로 도심이 공동화되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심각했던 노숙자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고 했다. 게다 사람들이 상점들을 공격해 털어가는 일이 너무 잦아지고 심각해져, Nordstrom 같은 대형 백화점들도, Wholefood 같은 식료품 매장들도 계속 문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환경이니 기업들도 직원들에 대한 안전문제 때문에 속속들이 도시를 떠나고 있단다. 덩달아 한국에선 샌프란시스코로 한 번쯤 여행가보고 싶었다던 사람들까지 무서워서 마음 접어야겠다는 얘기들이 종종 들린다.
보통, 한국 도시들은 단 몇 년 만에 찾아가도 많은 부분들이 바뀌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들에게는 낡은 것을 고쳐 빨리 발전하려는 욕구가 커서 그런 듯하다. 반면 미국이나 유럽 도시들은 꽤 오랜만에 찾아가도 그대로인 경우를 많이 본다. 꼭 도시에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이 우리보다 더 많아서인 것만은 아니었고, 그저 변화의 속도 자체가 우리보다는 좀 느린 게 아닌가 싶다.
일 때문에 자주 방문했던 미국 샌프란시스코도 몇 년 지난 후 다시 갔을 때 많은 것이 그대로였다. 그래서 좋았다. 휴식이 필요하거나 마음을 정리하고 싶을 때 자주 들르는 곳들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곳들이 여전히 그대로인 게 다행이었다. 그런데 요즘 그 도시에 대해 들려오는 소식들은 심상치가 않다. 다시 찾아가도 내가 예전에 보았던 그 분위기가 남아있을까? 왠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어, 기억을 뒤적여 샌프란시스코만의 인상적인 것들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는 캘리포니아에 있지만 청명한 하늘이나 따뜻한 날씨와는 거리가 먼 도시다. 일 년 내내 바람이 불고 약간 서늘한데 날도 흐리다. 깎아지른 듯한 고갯길이 굽이굽이 펼쳐져있어 걷든, 차를 타든, 뒤로 쏟아져 넘어져 버릴 것만 같다. 게다 안개에 시야확보까지 잘 안되니, 미국에서 운전하기 가장 어려운 도시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사실 이 동네 사람들은 liberal 하기로 소문나있다. 정치적으로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그렇다. 1960년대 '히피(Hippie)' 문화도 사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성적 개방, 영적체험을 추구한다며 대마초와 마약에까지 손댔던 이들 세대에 대한 비판도 많지만, 어쨌든 그만큼 보수적인 사회와 일반적 규범에 대한 저항이 전통적으로 매우 강한 도시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를 좀 알고 나니, 자욱한 안개가 마치 이 도시의 많은 이들이 피워대는 담배나 대마초 연기 같단 느낌도 들었다.
Columbus Avenue와 Braodway의 교차로에 가면 이런 샌프란시스코의 정신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두 군데 있다. City Lights 서점(City Lights Booksellers & Publisher)과 Beat 박물관(The Beat Museum)이다.
1950년대 미국에는 '비트 세대(Beat Generation)'라는 문학 운동이 있었는데, 표준적인 규범과 물질주의를 거부하고, 아시아 종교 등 새로운 영적 탐구에 심취하며, 성적해방이나 사이키델릭 한 약물 등을 주요 소재로 삼곤 했다. 1960년대의 히피 문화도 여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비트 문학의 선봉자들인 앨렌 긴즈버그(Allen Ginsberg)나 잭 케루악(Jack Kerouac)과 같은 문인들을 품었던 도시도 바로 샌프란시스코다. City Lights 서점은 이 비트 문학의 거점이 된 곳이고, Beat 박물관에 가면 Beat 문화 전반에 대한 다양한 전시품들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City Lights 서점은 이런 배경지식들에 별 관심이 없어도 단지 서점 자체의 분위기가 너무 좋은 곳이다. 그래서 나도 샌프란시스코에 갈 때마다 그곳에 거의 꼭 들르곤 했다.
City Lights 서점은 1953년 시인 Lawrence Ferlinghetti와 Peter D. Martin에 의해 세워졌는데, 책만 파는 게 아니라 City Lights Publisher라는 출판사를 겸한다. Beat 문학의 시조 격인 앨렌 긴즈버그의 유명한 시 "Howl"을 출판하면서 유명해진 출판사다.
얼마 전 내가 애정하는 "조승연의 탐구생활" 유튜브 채널을 봤는데, 조승연 님은 뉴욕 Strand Bookstore에서 "Howl"이라는 시를 접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Howl 이 당시 뉴욕의 어떤 상황을 반영했는지, 또 얼마나 충격적인 내용인지를 뉴요커의 관점에서 잘 설명해 주셨다. 그런데 그 책의 진짜 원조 출판사와 서점을 보려면 샌프란시스코의 City Lights 서점으로 와야 한다. 앨렌 긴즈버그는 뉴욕에서 나고 자라 활동한 사람이지만, 그의 시를 먼저 알아보고 출판해 준 사람들은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사 간 City Lights 서점 주인들이었던 것이다.
당시 Howl의 내용은 약물과 성행위 묘사 등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출판사 사장 로렌스는 외설물 출간죄로 법정까지 서게 되었다. 물론 단순히 외설물이 아니라 사회에 중요한 함의를 주는 작품이라며 재판에서 승소하긴 했다. 이 판례가 나중에 그 유명한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같은 책들이 금서 해제되는데도 영향을 주었다니, 이 출판사가 문학사에 준 파장도 정말 컸던 것 같다. 그렇게 재판정에 서면서까지 표현의 자유나 다양성을 옹호했던 출판사가 운영하는 서점이라면 실제 어떤 분위기일까.
이곳이 여느 서점들과 가장 다른 건, 단순히 책을 파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상을 담은 책들을 소개하고 그것을 읽는 것을 장려하는 장소라는 거다. "여기서 하루 14시간 죽치고 앉아 책 읽으면서 너 자신을 좀 교육시키는 게 어때?"라며 아예 대놓고 써붙여놓고 강권까지 한다. 그리고 "여기는 '도서관'인데 단지 책도 같이 파는 곳"이란다.
서점 안의 여러 섹션들을 돌아보면, 그냥 둘러보기만 했는데도 벌써 지성인이 되는 느낌이다. 각 섹션별로 멋지게 디스플레이된 책들은 그냥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들이 아니다. 책을 많이 읽는 서점 직원들이 손수 하나씩 고른(hand-picked) 것들이고 서점은 이에 대해 제법 큰 자부심이 있다. "민주주의는 구경꾼의 스포츠가 아니다", "세계의 작은 거리들이 정신의 대로들을 만나는 곳" 등등, 공간 구석구석마다 걸린, 지적욕구를 자극하는 홍보 문구들도 방문객의 수집 대상이다.
서점은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출판사의 출간물들도 큐레이션 해서 팔고 있다. 한쪽 벽에는 전 세계에서 출간된 책이나 작가들 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써붙여 달라는 메모보드도 있다. 책을 통한 사고와 세계관의 확장에 대해 이 서점은 정말 진심이다.
물론 이 서점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Beat 문학 섹션이다. 앞서 얘기한 "Howl"이라는 시집이 포함된 "Pocket Poets Series"가 유명하다. 잭 케루악의 "On the Road" 도 크게 전시되어 있다.
지하층에는 음악이나 영화 등 각종 예술 장르별 전문서적들도 많다. 다른 층에는 예술 만화도 있었다. 친한 지인이 인생 애니메이션으로 꼽았던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만화도 발견했다. 가격이 부담스러워서 구입하진 못했지만 그 외에도 사들고 오고 싶은 책들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공기 가득한 종이 냄새. 심지어 오래 앉아서 책 좀 보라는 엄청난 면학 분위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여기서 시간 다 보내고 집에 올 때는 이 책 저책 다 사서 손에 들려 있을 것만 같다.
서점 기념품 노트 표지에 그려져 있는 "Open door, Open books, open mind, Open heart"라는 문구가 이곳과 정말 딱 어울린다. 서점이 스스로를 "책과 자유로운 사상가들을 위한 커뮤니티 센터 (A community center for books and free thinks)" 라고 소개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여기에 오면 샌프란시스코가 어떤 분위기의 도시인지 압축적으로 한번에 파악이 된다. 그러니 샌프란시스코까지 와선 Fisherman's Wharf의 울부짖는 바다사자 같은 것들만 보고 돌아온다면 너무 아쉬울 것이다.
샌프란시스코는 예전부터도 다른 주나 도시들이 받아들이기 벅찰 만큼 개방적인 데다 마약과 각종 범죄로 몸살을 앓던 곳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여러 다양한 생각들을 진지하게 고찰하고,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는 정신, 익숙하고 당연한 것에 의문을 품으며 지적 게으름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이 도시가 세상에 던지는 소중한 질문이자 가치이다. 아마 그래서 이 지역으로부터 실리콘밸리가 태동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매우 안쓰러운 일로 이슈인 곳이 되어버렸지만, 부디 하루빨리 예전의 생기를 되찾았으면 한다.
* 조승연 작가가 "Howl"에 대해 소개한 영상을 걸어둔다. 이 영상을 보고 나면 이 서점이 미국 문학사에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이해하기 쉬워진다.
* 한국에도 뉴욕 Strand 나 샌프란시스코 City Lights 같은 서점이 있을까? 내가 아직 못 찾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있다면 그런 곳이 제발 좀 많아졌으면 한다. 이 나라에는 우리의 획일적인 사고를 좀 넓혀줄 수 있는 곳들이 정말 많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