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픽션| 빨간 전화 부스, 상자와 편지, 그리고 재회
런던의 오후 3시 30분은 애프터눈 티세트를 즐기기에 딱 맞는 시간이었다. 흐린 날씨가 먼저 떠오르는 도시지만 오늘은 히드로 공항에 내리자마자 눈이 부셨다.
호텔 라운지의 창으로 햇살이 쏟아졌다. 공항 근처에서 커피만 마시고는 그대로 캐리어를 끌고 왔다. 둥그런 대리석 테이블과, 핑크 플라워 패턴에 금테를 두른 찻잔이 반사돼 반짝였다. 물 잔만 채워두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분침이 6을 막 떠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오랜 친구를 만날 생각에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느꼈다.
“얼마만이야!”
얼굴을 제대로 볼 새도 없이 주은이 달려와 껴안았다. 이제는 ‘준’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벌써 5년 차 영국 새댁이었다. 6월 생이면서, 주은이라는 이름의 친구는 ‘June’이라는 이름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여전히 생기발랄한 모습은 10년도 더 지난 우리의 대학생 시절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넌 진짜 대학생 때부터 그대로다. 제임스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아?”
준은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고는 예약해 둔 애프터눈 티세트를 주문했다. 대학생 때 우리는 가끔 디저트 원정대로 불렸다. 그런 우리에게는 최적의 메뉴 선택이었다.
찻잔과 같은 디자인의 3단 티어드 스탠드가 나오자 우리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지막한 ‘우와!’를 연발했다. 나는 스콘을, 준은 휘낭시에를 집어 들었다. 대학생 때도 그랬듯 가장 먹고 싶은 것을 먼저 먹는 것이 우리에게는 룰이었다.
나는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을 바르며 물었다.
“사랑꾼 남편은 잘 있고?”
준은 장난꾸러기처럼 킬킬대며 웃고는 말했다.
“잘 있어. 지금은 테오랑 자동차 만드는 중이야.”
대학교 친구들과 만나면 아직도 준의 이야기가 회자되곤 한다. 나도 준을 만날 때면 한 번씩 그 이야기를 꺼냈고, 준은 몰랐던 부분에 대한 살을 붙여주곤 했기 때문에 늘 새롭게 재미가 있었다.
스콘과 휘낭시에를 손에 든 오늘도, 우리는 어김없이 그 이야기를 티 테이블에 올렸다.
준은 4학년이 되어서야 교환학생을 떠났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졸업이 다가오자 다시 하지 못할 경험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 동기들이 취업 준비에 매진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선택이었다.
해리 포터를 좋아해서, 차 마시는 것과 빨간 2층 버스를 좋아해서. 준이 런던을 택한 이유는 간단명료했지만, 충동적으로 떠난 것은 아니었다. 모아둔 과외비와 용돈을 체류 비용에 보탰다. 머물 곳은 기숙사가 아닌 학교 근처 홈스테이를 선택했다. 비교적 저렴했고, 또래 남매가 있어서 영어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특히 남매 중 오빠인 제임스는 준과 동갑에, 준이 다닐 학교의 학생이었다.
2층에 있던 준의 방은 한 면이 다락방처럼 기울어져 있고 그곳에 큰 창이 나 있었다. 아주 어두운 새벽에는 침대에 누워 넓은 밤하늘과 별을 볼 수 있었다. 애써도 잠이 잘 오지 않던 영국 생활의 첫날 알게 된 사실이었다.
방의 아늑함과 더불어, 홈스테이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주인 부부는 활달하면서도 따뜻한 준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들 제임스에게 자연스레 이것저것 챙겨주도록 했다. 여동생은 다른 지역의 대학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기도 했다.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 첫 수업 시작 시간이 같았던 둘은 교내 카페에서 스콘과 커피로 아침을 시작했다. 금요일은 한 시간 늦게 수업이 끝나는 준을 늘 제임스가 기다려 함께 왔다. 준은 홈스테이 학생을 안전하게 책임지려는 부모님의 지시겠거니 했다.
<둘이 매번 어디를 다녀오는 거니?>
어느 토요일 아침 제임스의 어머니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묻기 전까지는 그랬다. 뭐라 한 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템즈 강변을 걷기도 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가기도 하고, 건축학도인 제임스의 도슨트를 들으며 독특한 건물을 보러 가기도 하고, 런던 시내를 걷기도 하고, 영화를 보러 가기도,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기도 했기 때문에. 준은 그때부터 조금씩 눈치를 챘고, 제임스를 만나는 시간이 다가오면 설레는 스스로의 마음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학기가 끝난 후 돌아온 준의 생일에는 홈스테이 가족이 함께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케이크까지 먹고 난 후 너무 배가 부른 나머지 준은 제임스의 산책 제안에 지체 없이 응했다. 템즈 강변을 걸을 때면 늘 시간이 조금은 천천히 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걸 원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한 학기의 교환학생 생활은 마무리됐고, 어학연수와 여행 겸 두 달만 더 머무르기로 한 참이었다.
빨간 전화 부스에서 제임스는 가끔 하던 장난을 쳤다.
<누구세요?>
준도 장난스럽게 응수했다. 부스 안에서 전화를 건 제임스를 바라보며 진동이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받았다. 늘 전화를 거는 척 장난은 쳤지만 정말 한 것은 처음이었다. 준은 그 부스 안 공중전화가 정말로 작동하는 건지 늘 의문이었고, 그날이 돼서야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생일 축하해 준!>
<고마워 제임스.>
잠깐 웃던 둘에게 아주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고, 먼저 전화를 끊어야 할지 고민하는 준에게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좋아.>
준은 제임스에게, 이런 날을 한국에서는 1일이라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제임스가 가방 안에 숨겨온 작은 장미 꽃다발을 두 손으로 안아 든 채였다.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두 달 여밖에 남지 않는 상황에 대한 복잡한 마음이 스쳐 지나갔지만 우선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제임스도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함께 하는 시간이 짧은 만큼 추억은 빠른 속도로 쌓였다. 준의 방, 기울어진 벽면의 창문 옆 빈 공간에 빔 프로젝터로 영화를 틀고 별이 뜰 때까지 이야기를 했다. 늘 보기만 하던 런던아이를 처음 타 본 것도 제임스와 함께였다.
그 시절의 마지막 추억은, 학교에 있던 숲의 전나무 아래 흰 색의 작은 상자를 묻으러 간 것이었다. 준의 귀국을 사흘 정도 앞둔 때였다. 10년 뒤에 함께 찾으러 오길 약속하며 둘이 찍은 사진, 서로에게 쓴 편지, 작은 선물을 담았다. 일종의 타임캡슐이었다.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꾸미는 가장 키 큰 나무 근처, 조금 작은 나무 하나를 골랐다. 크리스마스 트리용 나무는 학생들이 몰릴 때 혹시나 상자가 다칠까봐, 둘이 머리를 맞대고 고심해서 적당한 다른 나무를 찾았다. 트리로 꾸미는 나무 옆에는 늘 작은 모종삽과 정원 도구가 비치돼 있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빠르게 작업하기에도 수월했다.
상자를 묻은 나무에 둘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남겼다. 흙을 덮고 다지면서 준과 제임스 모두 마음이 복잡했다.
그 후로 9000km에 가까운 거리를 사이에 두고 2년 넘게 장거리 연애를 이어가던 둘은 아주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말다툼을 했고, 지친 마음과 쌓여온 서운함이 폭발했다.
준은 무슨 일이었는지에 대해 늘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도,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아니라서 잊었는지도 몰랐다. 누구도 이별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지만 둘은 그렇게 헤어졌다. 준은 이제 런던을 가는 일은 평생에 두세 번, 어쩌다 여행 가는 일이 전부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근데 또 그 학교로 대학원을 가게 될 줄이야.”
준의 석사 과정 시절, 잠깐 런던에서 준을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내가 말했다. 이번에는 오이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문 상태였다. 고소한 버터와 상큼한 오이의 균형이 딱 맞았다.
“그러게 말이야. 회사에서 지원 가능한 학교 중에 제일 익숙하고 매력적인 선택지라. 여지가 없었지 뭐.”
준은 회사에서 일부 지원이 가능한 경영학 석사 과정을 위해, 떠나온 지 5년여 만에 다시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도착하자마자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앞으로 다닐 학교이자, 교환학생 시절을 보낸 학교부터 찾았다.
발길이 머문 곳은 학교의 숲이었다. 이따금 생각했던, 제임스와 함께 타임캡슐 상자를 묻어둔 나무 앞에 섰다.
준은 제임스와 헤어진 후 다른 사람과의 연애도 두어 번 해보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마음 한편에는 그에 대한 그리움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자꾸 고개를 내밀었다. 그럼에도 끝난 관계라면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리를 위해서, 아직 그 자리에 추억이 담긴 상자가 있다면 그것부터 버려야겠다고 나름의 결심을 했다.
나뭇잎 더미를 걷어내고 낑낑대며 땅을 팠다. 키 큰 전나무 옆 모종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날이 다소 무뎠다. 깊게 묻어 두지 않아 다행이었다. 삽의 끝이 상자에 닿아 소리를 냈다.
다만, 상자가 파란색이었다.
분명히 '하얀' 상자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준은 깜짝 놀랐다. 파란 상자를 꺼내어 뚜껑을 열어보니 제임스와 함께 넣었던 것들과 다른 것이 들어 있었다.
처음 본 파란 상자 안에는, 준의 귀국 후 장거리 연애를 이어가면서 제임스가 홀로 따로 쓴 편지들, 키링과 같은 아주 자그마한 선물들이 담겨 있었다.
상자 속 가장 위에 놓인 편지의 날짜는, 둘이 헤어지고 난 이후의 것이었다. 제임스의 아픈 마음에 더해, 마지막 줄에 준의 시선이 머물렀다.
‘언젠가 너를 완전히 잊었을 때 상자를 꺼내러 오려고. 아직은 아닌 것 같아.’
그제야 파란 상자를 꺼낸 자리 바로 옆에, 빼꼼히 모서리가 보이는 하얀 상자를 발견했다. 준이 기억하고 있는 그 상자였다. 흰 상자가 둘의 기억이라면, 파란 상자는 제임스의 기억이었다.
준은 두 개의 상자를 앞에 두고 얼마나 되는지 모를 시간을 주저앉아 있었다.
준은 그 이후의 일에 대해 늘 대는 핑계가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산책로에 나타나 다시 상자를 묻을 수가 없었고, 다시 잘 심어둘 자신도 없었다는 것이다. 숙소에 가져와 상자를 잘 닦아 두었는데 제임스의 것을 마음대로 가져와 버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며칠을 끙끙대다 다소 무모하게,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 지 마음을 정하지는 못한 채,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다면 제임스의 집 앞에 두고 오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익숙한 그 거리를 지나 문 앞에 섰다. 정말 혹시라도 제임스의 마음에 자신이 남은 상태인 건지, 그저 상자의 존재를 망각했거나 귀찮아서 그대로 둔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그 이후는 우리가 ‘운명의 영역’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이다. 상자 꾸러미를 들고 오도 가도 못하고 서성이는 준을, 빵을 사 오던 제임스의 아버지가 단번에 알아보았고, 저녁을 먹고 가라는 권유를 뿌리치지 못했고, 제임스를 만나보고 가라는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재회였지만 둘은 다시 만난 순간 지나온 시간 동안에도 서로를 잊지 못했다는 것을 비로소 확실하게 깨달았다. 좀 더 어른이 된 그들은 이번에는 사랑을 중심에 두고 현실적인 방법을 고민했고, 준이 석사 후 영국 내 취업을 결심하면서 오랜 기다림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준은 스콘을 집어 나이프로 반을 잘랐다.
“근데 얼마 전에 제임스가 하나 들킨 게 있거든.”
잼을 바르면 준이 말을 이어갔다.
“나랑 헤어지고 한 명이랑 잠깐 만난 게 다라고 했었거든? 근데 한 명 더 있었더라고. 클라우드 정리 제대로 안 했다가 들켰어.”
나는 쩔쩔매는 제임스의 모습이 상상되어 웃음을 터뜨렸다. 테오에게 혼나야겠다고 말하려다가 장난감 선물을 아직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저녁부터는 바로 바이어 미팅이 있어서 잊어버렸으면 전달이 조금 복잡해질 뻔했다.
“여기 테오 선물! 요즈음 한국에서 제일 인기 많은 자동차다.”
“알지 알지. 너무 고마워!”
준이 환한 얼굴로 선물을 받다가 내 왼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이 반지구나! 진짜 축하해!”
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얼마 전 프러포즈 때 받은 반지가 있었다. 반지는 라운지를 비추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내년 봄에 결혼식 꼭 갈게!”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라 절대 그런 부담 갖지 말라고 말했지만 준은 완강했다.
“우리 엄마 아빠도 손자 자주 보고 싶어 하셔. 제임스랑 테오도 같이 가도 되지?”
우리의 애프터눈 티세트 접시에는 이제 작은 레몬 타르트 하나와 마들렌이 남아 있었다. 사랑과 인연의 상징과도 같은 준의 가족이 와 준다면 나는 평생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준이 마음을 바꿀까 봐 타르트를 준의 접시에 옮겨 담으며 재빨리 말했다.
“당연하지! 다 같이 와서 나한테도 행복한 기 팍팍 전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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