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타인과 아이슬란드 오로라 헌팅

미니픽션 | 오로라의 다채로운 빛깔

by 이수민

눈발 사이로 멀리 숙소가 보였다. 지나치게 속도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오는 길에 한 번은 눈 속에서 바퀴가 파묻혀 헛돌았다. 차를 밀며, 구조 요청을 할 수밖에 없나 생각할 때 즈음 바퀴가 빠져나왔다.
히터는 잘 가동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몸에는 한기가 남은 것 같았다. 텀블러를 들어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예전에는 텀블러를 쓰는 날엔 컬러 없는 립밤만 바르려고 신경을 썼는데 요즈음은 그 마저도 잘 바르지 않았다. 건조한 입술을 커피가 살짝 적셔 주었다.
텀블러를 내려놓자 옆에 둔 하얀 비닐이 스쳐 바스락 소리가 났다. 오는 길에 보인 마트에서 잔뜩 산 클레멘타인이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빵과 커피만으로 버텨왔다. 아침에는 따뜻한 시나몬롤, 점심 즈음에는 담백한 호밀빵에 버터를 발라 먹었다. 그러려고 했다기보다 꼭 먹어야겠다 싶은 게 있지는 않고, 그 정도 마음으로 다른 걸 택하려니 좀 비싸고, 마땅한 식당도 보이지 않아 그렇게 됐던 것이었다.
그렇게 오후가 되니 채소라던지 과일이라던지 하는 상큼하고 아삭한 것들이 간절해졌다. 운전 중 눈에 띄는 마트에 재빨리 차를 대고 뛰어 들어갔다.
과일 코너에는 클레멘타인이 가득 진열돼 있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귤이랑 비슷해 보였다. 아이슬란드 물가로도 나쁘지 않은 가격이었다.
갈증이 나는 만큼 담았다. 가끔 물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종류의 갈증이 있다. 차에 돌아오자마자 세 개를 까먹고 기운을 차렸다. 달콤한 과즙이 주스를 마시는 것처럼 시원했다.


어제 저녁 케플라비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레이캬비크 방향으로 이동해 숙소에서 짐을 풀자마자 오로라 헌팅을 기대했지만 스코어는 좋지 않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예보에 없던 폭설이 시작되면서, 처음 해 본 오로라 헌팅 투어가 한 시간 정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잠시 구름이 없는 곳에서 초록빛이 약하게 퍼져 있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자세히 보아야 알아챌 수 있는 정도였다. 이렇게 계속 눈 오는 날씨가 이어진다면 짧은 여행 일정 안에 밝은 초록빛이 펼쳐진 하늘을 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오전에는 레이캬비크 시내에서 시간을 보냈다. 소품샵에서 귀여운 바다코끼리 키링을 하나 샀다. 일란성 쌍둥이인 동생에게 줄 선물이었다. 다 큰 어른이지만 아기자기한 것에 사족을 못 쓰는 소위 ‘어른이’였다. 내 것도 하나 살까 만지작거리다 이내 내려놓았다.
오후부터는 눈발 속 운전의 여정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아이슬란드 남부 해안 ‘비크’에서 촬영된 사진을 보고 매료돼, 언젠가 이곳으로 오로라를 보러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남은 여행을 모두 이 지역에서 보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레이캬비크에서는 거리가 좀 있다 보니 날씨 상황에 더해 가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숙소가 보이니 눈 속에서 긴장한 마음이 좀 풀리기 시작했다. 방에 가면 당장 클레멘타인을 몇 개 더 까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환영해요. 내일 아침까지 폭설 예보라 오늘 밤 오로라 투어는 어렵겠어요.>
눈을 털어내고 들어간 숙소에서는 노부인이 따뜻하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투어 취소 소식을 전하면서 나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은 했지만 힘이 빠졌다.
<내일은 어떨까요?>
<내일은 괜찮을 거예요. 그 다음날은 완전히 갤 거고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랜 운전으로 꽤 피곤하기도 했다. 안내받은 2층 방으로 올라가려 캐리어를 잡았다. 핸드폰과 클레멘타인 봉지와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더니 손이 부산스러웠다. 올라가려다 부인에게 물었다.
<혹시 좀 드시겠어요?>
부인에게 클레멘타인 두 개를 건넸다.
<클레멘타인을 사 왔어요? 좋아하나 봐요.>
<과일을 좋아해요. 빵만 먹었더니 더 먹고 싶더라고요.>
부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녁 식사 시간을 안내해 주었다. 투숙객들이 한 번에 앉을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에서 함께 먹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캐리어를 들어 올렸다.

저녁 식사 테이블은 음식의 열기와 사람들의 온기로 훈훈했다. 나는 테이블 끝에 자리를 잡았다가 좀 더 가까이 오라는 부인의 말에 한 자리를 당겨 앉았다.
숙소는 부부가 함께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부인의 배우자인 노신사와도 인사를 나눴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눈 때문에 잠시 지붕을 보러 간 중이었다고 했다.
옆에 앉은 스페인 여성은 긴 머리와 환하게 웃는 쾌활함이 생기 넘치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모델처럼 날씬한 케냐 국적의 친구는 같은 회사 동료라고 했다. 맞은편에는 벨기에에서 온 남성 둘 일행과, 장기 투숙 중이라는 이탈리아인 남성 한 명이 앉았다.
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눈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거실은 아늑했다. 주인 부부가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김이 나는 따끈한 고기 스튜가 한 그릇씩 놓였다. 양고기라고 했다. 커다랗게 썬 감자, 당근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따뜻한 빵과 버터, 오븐에 구운 비트, 버섯도 식탁에 올랐다.
주인 부부, 다른 투숙객들과 함께 하얀 도자기 스푼으로 크게 스튜를 한 입 떴다. 포슬한 감자가 부서졌다. 이미 데워진 몸이 또 한 차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고기를 뜨고 있는데 새로운 손님이 왔다. 주인 부부가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익숙해 보인 것이 그 때문이었다. 그는 인사와 함께 재빨리 스튜를 뜨고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식탁에서는 계속 구워내는 팬케이크처럼 이야깃거리가 쌓였다. 여기에는 사실 무엇보다 주인 부부가 내어준 글뢰기의 공이 컸다. 과일과 향신료가 들어간 따뜻한 레드와인이라 뱅쇼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마음을 감추고 있는 껍질이 한꺼풀 씩 힘없이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숙소 후기에서 이런 자리가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내용을 몇 번 봤지만 나는 어울리지 않을 줄 알았다.


투숙객들은 대부분 오로라를 보러 곳에 왔다. 마드리드에 있는 회사에서 근무 중인 여성 둘은 직장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이로, 겨울 휴가를 왔다고 했다. 벨기에에서 온 두 남자는 두 살 터울 형제로, 대학생이었다. 부모님이 오로라 헌팅 투어 중 처음 만나서 자라면서 수도 없이 그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덕분에 늘 궁금한 경험이었는데, 반년 간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해 번 돈을 보태 여행을 왔다고 했다.
벌써 3개월 넘게 머문 이탈리아인 남성은 사진작가였다. 내년 전시회를 위한 오로라 연작 촬영을 위해 왔다고 했다. 그는 베니스에서 열었던 전시회 사진을 몇 장 보여주었다. 모두 감탄하면서 다음 전시회에 꼭 초대해 달라고 말했다. 너무나 먼 곳에 사는 나는 어차피 어려울 테니 대충 얼버무렸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쏠리며 나의 차례가 왔다. 분위기를 깨지 않고 적당한 선을 지키며 이야기하려 애썼다.
<오래 준비한 시험을 보고, 오로라를 보고 싶어서 왔어요.>
나는 컵을 만지작거렸다.
<로스쿨을 졸업했는데 시험에 합격해야 법조인이 되거든요.>
테이블에 있던 이들이 멋지다고 추켜 세웠다. 나는 최근에 잘하고 있는 ‘억지로 자연스럽게 웃기’를 해냈다. 뒤이어 입가에 맴돌고 있던 말은 결국 꺼내지 못했다.
눈발은 여전히 가끔 창틀을 흔들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러 가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들어가기가 왜인지 조금 외로웠다. 장기 투숙 중인 이탈리아인 사진작가와 주인 아주머니, 그의 아들은 거실에 남았다. 아주머니는 그릇 정리 중이었다. 사진작가는 좀 떨어진 소파에 앉아 책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남은 글뢰기를 천천히 마시며 말린 살구를 집어 먹었다.
주인 부부의 아들이 글뢰기를 한 잔 따르고 내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변호사가 된다니 멋져요. 오래 공부했겠네요.>
나는 약간 초조해져 얼마 남지 않은 글뢰기를 벌컥벌컥 마셨다. 잠시 망설이다 조그맣게 답했다.
<사실 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는 고개를 떨구고 아까 끝내 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도 들릴 것 같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이 세 번째 시험이었어요. 친한 동기들은 예전에 합격해서 변호사고요.>
글뢰기에 알코올이 남아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까 나오지 않은, 어쩌면 상대방도 불편할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풀어냈다.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웃고 있었다. 요즈음 자꾸 이랬다. 일그러진 마음만큼, 겉으로는 웃어야 플러스 마이너스 0의 균형 있는 상태가 유지될 것 같아 그런지도 몰랐다.
앞에 앉은 그의 눈에 약간의 놀란 빛이 스쳤지만 이내 그 따뜻한 눈으로 되돌아왔다. 눈이 많은 것을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힘든 시간이었겠어요. 버텨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해요.>
내용은 다소 상투적일 수 있어도 진심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위로가 되었다. 나는 괜찮다는 답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한 번 나를 드러내고 나니 다음 대화가 편했다. 알고 보니 내 또래였다. 거실에 둘만 남을 때까지 이야기를 했다.
오로라를 볼 수 있을지에 대한 대화 한바탕, 아이슬란드 다른 지역에 대한 이야기, 그가 현재 일하고 있는 곳과 생활 패턴, 각자의 취미와 일상, 가족에 대한 이야기까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나의 수험 생활과 막막함에 대한 이야기도 굳이 피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나눠본 것이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하품이 나올 지경이 되자 겨우 인사를 하고 방으로 갔다.
<그 방이 좀 추워요. 가지고 가요.>
그는 초록색과 빨간색 체크 무늬의 포근한 담요를 건넸다.
<크리스마스가 생각나는 담요네요. 고마워요.>
나는 문을 닫고 담요를 휘감고는 클레멘타인을 까먹기 시작했다. 생각 없이 먹다 보니 그 많던 것이 두 개 밖에 남지 않았다. 비상식량으로, 아껴두기로 했다.

겨울이면 가족들과 귤을 쌓아놓고 까먹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간혹 다툴 때도 있었지만 나는 쌍둥이 동생과 자매이자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지냈다.
우리 사이에 소리 없는 벽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내가 시험에 불합격하고 난 뒤부터였던 것 같다. 동생은 벽을 치려 하지 않았지만 내가 동생의 얼굴을 보는 것이 점점 버거워졌다.
우리는 둘이 나란히 로스쿨에 진학했다. 학창 시절에는 항상 내가 미세하게 성적이 좀 더 좋았다. 그래서 가끔 아무리 쌍둥이라고 역시 언니라는 말을 듣곤 했다. 로스쿨도 따지자면 내가 더 좋은 학교에 입학했다. 동생도 합격을 간절히 원했지만 결국 같은 학교를 다니지는 못했다.
변호사 시험은 당연히 둘 다 합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합격자 명단에는 동생만 있었다.
그 후 첫 해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돈 버는 사람이 밥 사라고 하면서 동생에게 맛있는 것도 얻어먹고, 간혹 장난도 쳤다.
두 번째 불합격 이후에는 좀 달랐다. 처음 떨어졌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불안감과 억울함, 허무함이 몰려왔다. 이 시험이 나랑 맞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합격자 발표 후 한 달 정도는 집중하는 것도 어려웠다. 꽃이 만개하는 봄에, 내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 일’이 있었던 것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여름이었다. 독서실 에어컨이 고장 나서 유난히 집에 빨리 들어온 날이었다. 방문을 닫고 책상에 앉아 있었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다.
곧 동생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평소와 달랐다. 죽고 싶다고 소리치는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당황한 엄마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동생은 중견 법무법인에서 막내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의뢰인에게 심한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엄마 앞에서 죽고 싶다는 말은 그만두라는 약간의 나무람과, 방에 언니가 있다는 엄마의 말. 우는 소리가 급격히 잦아들었다. 작아진 흐느낌이 이어졌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방문이 달칵 열렸다. 동생이 들어와 나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나의 몸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작게 흐느끼고 있었다.
“언니, 미안해. 시끄러웠지. 왜 울어. 나 때문에 그래?”
나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내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엄마가 따라 들어와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살펴보았다.
“괜찮아? 왜 그래?”
“나 때문에 울어. 나 자신 때문에.”
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있잖아. 너 방금 죽고 싶다고 했을 때.”
동생이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죽으면 내가 너로 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 누가 알아보겠어? 나는 변시 그만 봐도 되고.”
나는 말을 내뱉고 펑펑 눈물을 흘렸다. 나의 마음은 생각보다 많이 망가져 있었다. 동생은 말문이 막혔다가 울었다가 했다.
엄마는 다음날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같은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해 나가는 사람, 다른 길을 찾아 너무도 잘 지내는 이들도 많았지만 내게는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아이슬란드 여행은 가족들의 선물이었다. 많이 호전된 내게 가고 싶은 곳을 물었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일기장에 끼워 둔 사진을 꺼내 들었다. 하늘에 초록빛이 찬란히 펼쳐진 광경. 동생이 여행 경비를 가장 많이 부담했고, 가서도 절대 아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아빠는 매일 영상 통화를 한 번 이상 반드시 걸어야 한다고 단호한 표정으로 강조했다. 시차를 잘 맞추어 아빠의 요구 사항을 이행하는 조건으로, 나는 세 번째 시험을 치른 뒤 이곳까지 날아올 수 있었다.
마음이 좀 나아졌을 때, 한 순간이라도 그런 생각을 한 나를 용서할 수 있는지 동생에게 묻고 싶었다.
용서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들을까 봐 결국 나는 그 질문을 입밖에 내지 못했다.
불을 끄자 칠흑같이 깜깜했고, 나는 이불을 잔뜩 끌어안았다. 눈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잠이 들었다.

전날의 피로 때문이었는지 눈을 뜬 것은 정오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늦은 잠에 든 영향도 있는 듯했다. 나는 원래 잠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로스쿨에 진학 후에는 이렇게 늦게까지 자 본 것이 몇 년 만의 일인 것 같았다.
늦은 기상이었지만 아직은 몸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릎에 걸려 있는 담요를 끌어올려 몸을 감았다.
간밤의 깊은 잠 속에는 오랜만에 꿈이 지나갔다. 나는 간혹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가능한 꿈을 꾸기도 했는데 이번 꿈은 극도로 평범했다. 나는 아주 어렸다. 아마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나이 같았다. 동생과 토끼풀이 깔린 잔디에서 벤치 옆에 앉아 있었다. 무엇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음이 더없이 편안했다. 실제로 어린 시절에 그런 장면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어릴 때 엄마는 토끼풀이 있는 곳이면 우리에게 반지를 만들어주곤 했다. 동생은 집에 오면 쉽게 잊어버렸지만 나는 마를 때까지 간직했다.
커튼에 가려 창 밖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리와 공기만으로도 눈이 잦아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커튼을 젖혔다. 지붕 위에 눈이 조용히 쌓여 있었다. 하늘은 파랗게 맑았다. 오늘은 기대했던 대로 오로라를 보러 투어를 떠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 숙소를 선택한 것도 오로라 헌팅 때문이었다. 주인 부부가 직접 가이드하는 투어의 평이 좋았다. 투어 안내도 체계적이고, 안내하는 장소도 오로라 관측에 적합한 데다, 사진도 적극적으로 촬영해 주어 만족도가 높다는 후기가 몇 년에 걸쳐 쌓여 있었다.
창밖을 보고 난 후에야 허기를 느꼈다.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알아서 요기를 하려 했지만 계단을 내려서자마자 주인 아주머니와 마주치고 말았다. 직접 챙겨 먹겠다는 나의 말은 이내 묻혀 버리고 이미 테이블에는 식사가 차려지고 있었다.
하얀 스키르에 블루베리 잼을 듬뿍 올리고, 한 입 크게 떠 넣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잔에 따뜻한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저녁 9시에 오로라 헌팅을 떠나기로 했어요.>
내가 먹느라 우물거리며 기쁘다는 대답을 했다. 음식은 이미 충분해 보였지만 아주머니는 사과를 듬뿍 잘라 또 내 앞에 놓아 주었다. 한 입 베어 물면 아삭 소리가 날 것 같은 빨갛고 단단한 사과였다.
<멋진 오로라가 보일 거예요. 기대해도 좋아요.>
늦게 일어난 덕에 기다리는 시간이 길지 않아 좋았다. 나는 대단한 준비물은 없지만 먹고 올라가자마자 투어에 가져갈 가방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캄캄한 밤에 밴에 탄 사람들은 기대감으로 잔뜩 들떠 있었다. 이미 숙소 밖에서도 다소 희미하지만 밤하늘에 퍼진 초록색 빛이 보였다. 저 초록색 빛의 끝을 살살 잡아당기면 진한 초록빛이 확 끌려 나올 것만 같았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창밖으로 스치는 광경은 조바심에 가까운 기대감을 주었다. 내 심장은 주인공의 등장 전 두드리는 북소리처럼 빠르게 뛰었다.
20여 분을 달린 밴이 부드럽게 멈추어 섰다. 우리는 캄캄하고 너른 해변에 서서, 더 넓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상으로만 그려왔던 초록빛이 하늘 가득 펼쳐져 펄럭이는 커튼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실제 오로라는 사진에서 보는 것만큼 선명하지 않다는 후기를 여러 번 보고 실망하지 않으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지만 꽤 뚜렷한 초록빛이었다. 투숙객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빠르게 말하고 간간히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로라의 끝을 눈으로 좇기도 하고, 움직임을 뚫어져라 따라가기도 하면서 오로라를 보는 모든 순간을 마음에 담아 넣느라 바빴다. 나는 혼자만의 우주에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찰칵. 가까이에서 들리는 셔터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이탈리아인 사진작가가 사람들을 촬영해 주고 있었다. 의사 표현을 할 겨를도 없이 내 차례가 되었고, 이내 나는 초록빛의 장관이 담긴 사진의 주인공이 되었다.
<내년 로마 전시회에 작품으로 걸어도 괜찮겠어요?>
심각한 표정으로 묻길래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카메라 화면에 나타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아주 자세히 보아야만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실루엣에 가까웠다. 나는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가벼워진 목소리와 함께 전시회에 꼭 오라는 초대가 되돌아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여기 있는 모두가 가도 나는 갈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잘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 액자에 담길 그 사람은 ‘나’였다. 로마가 멀다 한들 이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는 나답지 않게, 대책도 없이 꼭 가겠다고 답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다시 혼자 하늘을 뚫어져라 올려다보다가, 해변 바닥에 그대로 앉았다. 그러다가 아무것도 깔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까끌한 모래 바닥이 닿았다.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초록색 빛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계속 다른 무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잡으려는 것처럼 손을 뻗어 움켜쥐었다. 조금은 잡혔을지도 몰랐다.

그가 나타났다. 어젯밤의 긴 대화 이후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숙소에서 출발할 때 밴에 타지 않고 따로 차에 가길래 다른 목적지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내 옆에 털썩 앉더니 하늘을 보며 말했다.
<몇 번씩 봐도 아름다워요. 오늘 아주 잘 보이네요.>
나는 맞장구 칠 말이 잘 생각나지 않아 잠시 생각하다 방금 확인한 앱 화면이 떠올라 말했다.
<오늘 KP 지수가 5더라고요. 굉장히 좋은 거죠?>
<아주 운이 좋은 거죠.>
우리는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색의 오로라도 구경해 볼래요? 오늘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다만 거리가 좀 있어요.>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는데 이 정도 경험 있는 사람의 제안이라면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겠다고 말했다.
그의 차를 타고 적막 속에 가다가, 음악을 틀고 가다가, 무성한 나무가 하늘을 뒤덮은 터널 같은 길을 한참 지나자 순식간에 넓은 하늘이 열렸다. 차가 멈춰 섰다.
그곳에는 붉은 오로라와 초록색 오로라가 함께 물결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언뜻 보랏빛도 보이는 듯했다. 붉은 오로라가 있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볼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장식 같아요.>
나는 약간 멍한 상태로 말했다.
<이것처럼요?>
그가 어제 내게 건넨 것과 똑같은 체크무늬 담요를 바위 위에 깔고는 앉으라고 손짓했다. 지나가다 본 바로는 숙소에 같은 것을 여러 개 구비해 둔 듯했다. 나는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약간 수박 생각이 나기도 해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따라 웃었다. 나는 크리스마스 장식 같기도 하고 수박 같기도 한 그 신비로운 움직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름답죠?>
그가 물었다.
<엄청나게요.>
나는 여전히 하늘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보통 오로라 하면 초록색만 떠올리잖아요.>
나는 이제 바위에 두 다리를 올리고 앉아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초록색 오로라만 있는 건 아니에요. 다른 색 오로라도 이렇게 아름다워요.>
나는 그 조심스러운 목소리에서 그가 무슨 말을 해주려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알아차렸다. 눈빛만큼 마음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눈물이 살짝 고여 오로라가 살짝 블러 처리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잠시라도 오로라를 보지 못하는 순간이 아까워 소매로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남은 눈물이 찬 공기와 만나 눈 주위가 시큰했다.
<맞아요. 몰랐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나는 냅킨이라도 가져오지 않았나 싶어 괜스레 별로 든 것도 없는 가방을 뒤적거렸다. 손 끝에 바다코끼리 키링이 걸렸다.
<저 이거 하나 더 사려고요. 동생 것만 샀지 뭐예요.>
그가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귀여운 것들을 많이 파는 가게가 숙소 주변에 하나 있다고 말했다. 내일 안내를 받기로 했다.
문득 입 안이 아쉬워 생각하다가 배낭에 넣어 온 비상식량을 떠올렸다. 나는 재빨리 클레멘타인을 찾아 하나를 손에 쥔 채 그에게도 하나를 건넸다.
우리는 껍질을 까 그 달콤하고 새콤한 과육을 한 입 가득 씹었다. 시트러스 향이 코 끝을 훅 스치고, 달콤하고 시원한 과즙이 터졌다.
나는 살짝 달큰해진 손을 뻗어 오로라를 한껏 움켜 잡았다. 붉은색과 초록색, 그리고 정확히 보이지 않는 색이 뒤섞인 빛이 한 움큼, 잡혔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