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픽션] 우정이 시작되는 순간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복도에서 저 앞에 먼저 걸어가는 동기가 보였다. 애매하게 야근을 하고 들어가는 시간이라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줄 알았다.
나는 동기를 따라잡아 인사를 하는 대신 그대로 다시 돌아 사무실로 향했다. 누가 나를 봤다면 무언가 두고 나온 줄 알았을 것이다.
나는 사무실 도어락을 열고는 잠깐 내 자리에 앉아 오늘 축의금 답례품으로 받은 견과와 쿠키 세트를 챙겼다. 그렇다고 해서 이걸 챙기러 온 것은 아니었다.
사이가 나쁜 동기도 아니었다. 이틀 전에도 우리는 점심 약속을 잡고 둘이서 파스타를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그런데도 뒤돌아 온 이유를 설명하자면, 우선 가벼운 스몰 토크 정도도 나눌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때에는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몇 층 내려가는 시간마저도 너무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날카롭게 말하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는지 곱씹게 되는 것도 싫었다. 나와 성향이 상극에 가까운 친구에게 이런 나의 특성을 이야기해 본 적이 있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 피곤한 영혼을 안고 가야 했다.
이런 나를 간혹 신기하게도 아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신비한 이들이 있는데, 살면서 만난 그런 몇몇 사람들이 내겐 오랜 친구가 되어 주었다.
오늘 나를 앞서 걷는 사람이 클레어였다면 아마 나는 좀 더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물론 클레어에게도 내가 도망치는 사람에서 다가가는 사람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있었고, 그 사이에 대단한 사건들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온기 같은 것을 주고받는 일이 몇 번 있었을 뿐이다.
나는 버스에서 드디어 클레어의 이름을 부른 그날을 떠올렸다.
시드니에서의 워킹 홀리데이는 몇 개월 전만 해도 생각도 해본 적 없는 계획이었다. 물론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는 것도 계획에 있던 바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시드니의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게 된 것은 내 인생에서 일종의 나비효과였다.
전 회사는 취업할 당시만 해도 내 또래라면 웬만큼은 ‘아, 나 거기 알아!’ 라던지 ‘아! 나 거기 거 좋아해!’ 중 하나 정도의 반응을 내놓는 꽤 알려진 스타트업이었다. 우리는 체중조절용 식품을 만들었다. 나는 제품을 기획하는 팀에서 꽤 자주 유통이나 영업까지 도맡으면서 바쁘게 살았다.
욕심이 지나쳤던 모양이었다. 회사는 소아 비만을 겨냥한 유아 및 어린이용 식품을 급하게 내놓았다가 위기를 맞았다. 유아와 어린이에게는 간 손상을 유발할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회사는 순식간에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간혹 미국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나는 마지막 날, 상자 하나에 책상에 두었던 몇 가지 사무용품과 인형을 정리해서 들고 나왔다.
그날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했다는 말은 아직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다.
그곳에서 나는 조금 외로웠다. 회사에서 아주 가까운 친구를 만들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가끔 허전함이 스쳐 지나가곤 했다.
예전부터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보다는 혼자가 편했다. 직원들이 대체로 어리고, 외향적인 사람들의 비율이 높은 회사의 분위기가 편안하지는 않았다. 마음 맞는 직원들끼리 서핑을 간다던지, 점심시간을 이용해 크로스핏을 하기도 했다. 나는 흥이 많은 부류가 아니어서 이런 성격의 모임에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가까운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동기 둘과 셋이서 종종 점심도 먹고 단체 카톡방도 있었지만, 종종 혼자 겉도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해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 영어에 능통하고 통하는 점도 많았다. 가끔 둘이 만나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괜한 느낌인지는 몰라도 나와 함께 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나는 서서히 자발적으로 셋이 보는 자리에 종종 빠졌다. 내가 재취업에 번번이 실패하고 실업급여를 끝까지 받는 사이, 둘은 긴 공백기 없이 같은 회사에 취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가 워킹 홀리데이를 택한 데에도 그 소식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 짧은 해외 경험이나마 스펙으로 갖춰보자는 생각을 했고, 그중에서도 돈을 벌면서 가능한 것을 찾다 보니 워킹 홀리데이에 이르렀다.
클레어는 내가 일하게 된 카페의 헤드 바리스타였다. 첫날부터 함께하며 일을 가르쳐 주었다. 처음에는 사무적인 느낌으로 간단하게 설명하길래 다소 차가운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간 지내보니 그런 부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열심히 가르치고 나면 금방 그만두는 일을 여러 번 겪고 나서는 다소 시큰둥한 태도가 되었다고 했다.
사적인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심하게 복잡하고 말이 빠른 손님의 주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식은땀을 흘릴 때면 클레어가 곧바로 나타나 나의 부족함을 메워 주었다. 고맙다고 말하는 내게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어 주었다. 대단한 것을 해주진 않아도 늘 소소하게 꼭 필요로 하는 것을 건네주는 사람이었다. 이럴 때면 내 또래지만 한참 언니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한국에서 간간이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날아왔지만 내가 발 디디고 있는 곳에서는 함께 축하해 줄 사람이 없었다. 본래 생일에 대단한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지만 약간의 외로움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손님이 없을 때 클레어가 조용히 부르길래 내가 무언가를 잘못한 줄 알았다.
<생일 축하해!>
클레어는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축하와 함께 묵직한 상자를 건넸다. 상자 안에는 커다란 바나나 브레드가 들어 있었다.
나는 두 가지 중 어떤 것을 먼저 물어볼까 망설였다. 말한 적 없는 생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 바나나 브레드를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시드니 중심가의 유명한 베이커리에서 만드는 이 바나나 브레드는 구하기 힘든 것으로 유명했다. 외국에서도 맛있는 가게 앞에서는 줄을 선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곳이었다.
클레어는 마치 나의 생각을 읽은 듯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력서 보고 생일이 멀지 않길래 기억해 뒀어.>
그리고는 바나나 브레드 상자의 리본을 잠시 만지작 거리더니 말했다.
<내가 시드니에 온 첫 해 생일을 혼자 보냈거든.>
이 바나나 브레드는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물으며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자 클레어는 특유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제스처를 했다. 사실 그 베이커리에 아는 친구가 있어서 원하면 구할 수 있다고 했다. 매번은 어렵지만 생일처럼 특별한 날에는 말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나는 이미 클레어를 좋아했지만 이날 이후 마음의 거리가 훨씬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문제는 그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클레어가 다른 카페로 일터를 옮기게 된 것이었다.
클레어의 번호를 갖고는 있었지만 연락해서 만날 만한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클레어도 특별히 연락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마 그대로면 우리는 다시 만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두 달 정도 일을 하고 난 뒤 학원에 등록해서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평소보다 조금 늦게 탄 날,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버스에 타는 클레어를 보았다. 순간적으로 몸과 손이 움찔했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불편해할지도 몰랐다. 달리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가기도 어색할 것 같았다. 클레어는 나를 전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클레어가 나와 같은 정류장에서 일어서자 당황했지만 두 사람 정도 뒤에 서서 눈에 띄지 않고 내리는 데 성공했다. 내려서는 클레어가 나와 반대 방향으로 곧장 걸어갔기 때문에 더 피할 필요는 없었다. 그 뒤에도 한 번 같은 상황이 있었지만 매번 나는 비슷한 수법으로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늘 마음대로 되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망설이다 우산을 가져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던 날이었다. 비가 이례적으로 세차게 내려서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도착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비를 쫄딱 맞은 모습의 클레어가 탔다. 추운지 팔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두 정거장 뒤면 우리는 또 같은 곳에서 내릴 것이었다.
클레어가 먼저 일어섰다. 나는 클레어와 한 사람을 사이에 두고 섰다. 비를 좀 맞고 가는 것이 그렇게 큰 일은 아닐 거야.
분명히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버스 문이 열리고, 클레어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외쳤다.
<클레어!>
클레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더니 내 이름을 부르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얼른 다가가 우산을 펴고 클레어에게 바짝 다가섰다.
우리 집까지 가서 옷이랑 우산만 빌려 주려다가, 집에 있는 소비뇽 블랑과 치즈만 좀 같이 먹으려다가, 하나 더 사둔 파자마를 빌려주고는 몇 시간 동안 수다를 떨게 되었다.
짭짤한 것만 먹다 보니 디저트가 필요했다. 생일날 이후 그 맛에 반해 집에 상시 구비해 두는 것이 있었다. 집에서 걸어갈 거리에 아주 괜찮은 베이커리가 있었다.
나는 식탁에서 바나나 브레드의 포장을 풀었다. 바나나와 시나몬의 향, 고소한 피칸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나는 바나나 브레드를 들어 클레어에게 보여 주고는 커다란 접시를 두 개 내왔다.
클레어가 식탁에 걸터 앉아 말했다.
<완벽한 파자마 파티 디저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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