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by Stella by Starlight


우붓의 어느 민박.

사진 속 야자수는 싱그러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무 그늘 속 건물은 다소 음침했고

구멍을 내 장식한 벽 뒤로 길거리가 훤히 보였다.

가장 괴로운 건 청결도를 판단하기 어려운 현란한 담요였다.

덮지도 치우지도 못한 채 뒤척인다.

내일 아침 떠날 생각만한다.


요란한 빗소리가 구멍을 통해 날 것처럼 들린다.

선잠에서 깬다.

동남아 비는 짧고 굵게 내리지 않던가.

속 편하게 기다리다 이내 초조해진다.

빗줄기는 여전히 맹렬하다.

이 비에 큰 배낭과 캐리어, 우산까지 들고

터미널로 이동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웃의 다른 숙소로 옮길 수도 없다.

이 곳에 고립되었다.


고립.

그것을 깨닫는 순간,

묘한 기쁨이 온몸을 퍼져나갔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더 나은 숙소를 찾기 위해 노력도 자책도 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이 곳에서 나갈 수 없다.


배낭을 뒤져 수첩과 펜을 꺼낸다.




'묘하게도 비가 와서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최악의 숙소에서 하루를 더 머무르게 된 오늘, 비로소 마음이 안정된다. 자연은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불안감에 버둥거리는 나를 붙잡아 매었다. 그렇게 완성된 한 문단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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