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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공포가 기승을 부리는 날

건강검진 시기가 찾아왔다.

by 정벼리

남편과 나는 매년 이맘때 건강검진을 받는다. 평소에 잠깐 정신줄을 놓으면 상상 속에서 오만가지 엄청난 재난과 고초와 대면하여 매일 섀도우복싱을 벌이는 나지만, 그 대부분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다. 실제 현실상황에서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는 건강검진을 받는, 매년 반복되는 아주 평범한 날들이 아닌가 싶다. 올해도 그 무서운 날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나는 병원에 가면 심장이 뛴다. 당연히 좋은 의미의 두근거림은 아니고, 심박수가 이상하게 빠르게 올라가는 것이다. 결혼하기 전 크게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뒤로 생겨난 증상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나처럼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을 보면 심박수가 증가하는 증상은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겪는 일이다. 그냥 증상을 인지하고 있고 안정을 취하면 곧 좋아지는 증상이라고 한다.)


꼭 아파서 치료를 받으러 갔을 때만 심장이 선덕거리는 것이 아니다. 병원에 간 경위를 가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 이주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갈 때에도 그랬다. 매번 진료 전에 혈압부터 재야 했는데, 병원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때에는 항상 심박수와 혈압이 치솟아있었다. 그래서 늘 예약 시간보다 한참 일찍 병원에 도착하고, 심호흡을 백번씩 한 뒤에 혈압을 재곤 했다.


잠시 병원에 머무를 때에는 심호흡을 하면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아서 그 뒤에 진료를 보고 나오면 되는데, 일 년에 한 번 건강검진을 받는 날에는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엑스레이실, CT촬영실, 심전도측정실… 각 방을 돌아다니며 검진을 받는데, 새로운 방에 들어설 때마다 심장이 새롭게 날뛰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 마음 편한 방이 없지만, 그 많은 검진실 중에 가장 심장이 쿵쾅거리는 곳은 역시 초음파 검사실이 아닐까 싶다. 잠시 부동자세로 촬영하고 나오면 되는 다른 검진실보다 비교적 조바심이 오래가고, 가라앉혀도 자꾸 불안이 다시 고개를 들이민다. 의료에는 문외한인 일반인인지라 초음파 기계에 뜨는 영상을 해석할 능력은 전무하지만, 의사 선생님이 초음파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자꾸 저장 버튼을 누르는 숫자가 많아지는 게 긍정적 사인이 아니라는 눈치 정도는 든다. 그 방에서는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심박수가 가라앉지를 않는다.


올해 초음파 검사를 받는 동안도, 생각하는 방에 들어온 양 머리와 마음이 복잡했다. 갑자기 지난 일 년을 반추하며 운동을 게을리하고 나태하게 보낸 시간들을 후회하고, 좀 더 건강한 먹거리를 찾지 않은 스스로를 탓하고, 검사시간이 길어질수록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오만 부정적 상상의 가지가 뻗어나가는 나의 내면을 지금 여기, 현실에 붙잡아두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온갖 검사를 받고 집에 돌아오니 완전히 지쳐버렸다. 수면내시경 진정제 약기운까지 겹쳐 하루 종일 비실비실 늘어지기만 했다. 이제 바랄 것은 올해도 완벽하진 않지만 당장 큰 탈은 없다는 반가운 통보뿐이다.


아, 골골 백세의 꿈은 왜 이렇게도 간절하지만 어려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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