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만에 여행 가서 푹 쉬다 온 거야.
우리 아이는 꽤나 정적인 집순이 기질을 뽐내지만, 그래도 아이는 아이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은 싫어하고, 깔깔 웃는 것을 좋아하는 그냥 흔한 어린이. 그래서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은 늘 휴식보다는 고행에 가까웠다. 매일 새롭고 익사이팅한 경험들을 차곡차곡 채워 넣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입이 댓발 나와서 지루해, 언제 끝나, 다른 데 가자 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으니까.
간혹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 이런 이유로 어렵다는 얘기를 들으면, 아이가 좀 지루해하면 안 되는 거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물론 아이가 좀 지루해도 된다. 다만 어렵게 맞춘 휴가날에 비싼 돈 내고 떠난 타지에서 아이가 투정을 부리기 시작하면, 그런 상황은 대부분 열받은 부모의 화난 얼굴과 훌쩍대는 아이의 눈물로 종결된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여행을 가서 하루에 한두 번은 아이가 즐거워할만한 활동을 꼭 일정에 포함시키는 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고 싶은 활동을 할 때에는 미리 아이와 타협을 하곤 한다.
"아까 엄마 아빠가 널 위해서 OO에 갔던 것 알지? 이번에는 엄마 아빠가 즐거울 차례야. 네가 좀 재미없더라도 잘 참고 같이 다녀야 해."
그리고 아이가 입이 좀 튀어나오려고 하면 경고도 날린다.
"아까 약속한 것 잊지 않았지? 여행은 모두가 즐거워야 하는 거야."
그랬던 우리 가족이, 아이가 태어나고 처음으로 온전히 휴식으로 가득 채운 휴양여행을 다녀왔다.
전국 방방곡곡 특별한 여행지를 꿰고 있는 지인이 있다. 어디 동남아 리조트에 가서 리조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며칠이고 마사지나 받으며 열대과일을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고, 해가 지면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산해진미를 또 먹으며 그저 쉬고 또 쉬는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는 나에게 지인은 수안보 온천여행을 권했다. 나는 그저 웃었다. 정말이지 놀리듯 장난치는 것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진지했다.
"수안보에 OOO라고, 고급 온천호텔이 있어. 호텔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아도 호텔 안에서 먹고 온천욕 하다 보면 24시간이 부족할 거야."
그런 곳이 있다고? 찾아보니 식사와 온천이용료, 다과 등이 모두 포함된 올인클루시브 형태의 온천호텔이었다. 객실마다 노천탕이 있고, 널찍한 대욕장도 따로 달려있다니 휴식하며 피로를 풀기엔 그만이겠구나 싶었다. 다만 발목을 잡는 것은 상당한 숙박료였다.
"언니, 여기 며칠 묵으려면 월급 탕진해야겠는데요?"
"요금에 식사가 포함된 건데, 매일 저녁과 아침 메뉴가 바뀌지 않아. 아마 호텔도 1박 2일 머무르는 것을 콘셉트로 잡고 운영하는 것 같아. 어차피 여러 날 휴가 내기가 곤란하다며. 짧고 굵게 쉬다 오면 좋잖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괜찮을 것 같았다. 욕조에 몸 담그기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다과와 식사가 끊이지 않는다고 하니 아이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새로운 경험을 하는 듯한 느낌도 들 수 있고. 남편과 의논한 끝에 큰맘 먹고 한 번 다녀와봤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이가 거의 완벽하게 휴양여행을 즐겼다. 덕택에 나도 원하던대로 아주 잘 쉬었다. 와, 이게 얼마 만에 여행지에서 오롯이 쉬다 온 것인지. 1박 2일이라 짧았지만, 그만큼 강렬한 휴식이었다.
노천탕에 늘어지게 몸을 담갔다가, 시원한 음료 한잔 마시고 너른 침대와 소파를 뒹굴며 각자 책을 읽고, 대욕장에 나가 또 몸을 담그고, 배가 터질 때까지 식사를 하고, 별을 보며 도란도란 얘기하다 잠들고. 먼저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며 남편과 말했다.
"여보, 여행 가서 박물관 안 들르고 과일 따기 체험 안 한 거 처음인 것 같아."
"그러게. 우리 생애에 이런 여행을 하는 날이 다시 오긴 하는구나."
비속어는 되도록 안 쓰려고 노력하지만, 이번만큼은 이 들뜬 마음을 표현할 다른 말을 찾지 못하겠다. 존버 끝에 드디어 희망의 서광이 비췄다. 시간이 가고 아이는 자라난다. 아,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