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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고 소중한 내 연차

알뜰살뜰 아껴야 하는 것은 월급뿐이 아니다.

by 정벼리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지난주부터 사무실 주차장이 부쩍 한산해졌다. 산으로 들로 바다로, 그리고 바다 건너로도 다들 떠나나 보다. 우리 가족은 삼복더위에 집 나가면 멍멍이 고생이라는 지론이라 가급적 여름휴가는 8월 중순 즈음, 성수기를 살짝 비껴서 떠나곤 한다.


관광업계 표현을 빌리자면 준성수기에 휴가를 즐기는 것인데,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일단 극성수기에 비해 사람이 붐비지 않아 어딜 가더라도 대기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숙박비나 이런저런 요금도 한결 가벼워진다. 날씨도 칠말팔초에 비하면 화끈함이 한풀 꺾여있어 바깥에 나와 있어도 조금은 덜 고생스럽다.


반면 치명적 단점도 공존하는데, 지금과 같은 칠말팔초에 정작 나는 아무런 휴가 일정이 없더라도 괜스레 남들이 휴가를 떠나고 나면 사무실에 남은 마음이 싱숭생숭 들뜬다는 것이다.




휴가철에 사무실에 남은 사람들끼리 점심때 차로 10분 거리의 이름난 냉면집에 가기로 했다. 보통 점심시간에는 함부로 주차장에서 차를 빼지 않는 편이다. 밥 먹고 돌아오면 차를 댈 공간이 없어 난감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휴가철답게 평소보다 확연하게 덜 붐비는 주차장 풍경에 우리는 용기를 냈다. 예상대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에는 오히려 수월하게 주차를 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우리가 가려고 했던 냉면집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냉면집 앞에는 줄이 두 줄로 나있었다. 사람 줄과 차량 줄. 우리 앞에 늘어선 예닐곱 대의 차는 어떻게 기다려본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사람 줄이 계속 늘어나는 것이 문제였다. 이 더위에, 땡볕 아래 줄을 서서 먹어야 할 만큼 냉면이 중요한 음식인지, 원초적 의문이 우리 사이 침묵을 통해 공유되었고 한 순간 너나 할 것 없이 그냥 어디 가서 김밥에 떡볶이나 먹고 들어가자는 새로운 합의에 도달하였다.


째깍째깍 점심시간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우리는 가장 차를 쉽게 댈 수 있는 인근 쇼핑몰로 향했고, 푸드코트에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떡튀순 세트와 김밥을 사들고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이게 무슨 난리래요. 이렇게 먹을 줄 알았으면 그냥 사무실에서 시켜 먹을걸."
"푸흡, 그러게 말이에요. 이런 게 바로 뻘짓이죠."
"그나저나 여기 푸드코트는 한산하네요. 이것도 휴가철이라 그런가."
"아, 나도 휴가 가고 싶다."


나의 탄식 섞인 푸념에 A가 말했다.


"휴가 안 가세요?"
"아... 가야죠. 8월 중순 넘어서 가려고요. 그냥 남들 다 떠나고 나니 싱숭생숭해서 그렇지."
"하루이틀 휴가 내고 집에서 그냥 쉬세요."


A는 첫 아이를 낳고 복직한 지 아직 반년도 지나지 않은 초보 워킹맘인데, 역시 짧은 워킹맘 경력이 이렇게 티가 난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정색하듯 A를 바라보며 말했다.


"A 씨, 작고 소중한 건 우리 월급뿐만이 아니에요. 일하는 엄마아빠는 연차도 알뜰살뜰 아껴 써야죠. 쉬고 싶다고 막 썼다가 어느 순간 연차 바닥났는데, 연말에 애가 독감이라도 걸려봐. 죽음이에요."
"아... 별이는 꽤 컸잖아요. 그런데도 연차를 아껴야 하나요."
"그럼요. 더군다나 연초에 겨울방학 때 열흘 정도 써버려서, 여름휴가 다녀오면 남은 개수도 몇 개 안 돼요."


다 크다 못해 이제 나이 들어가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떡볶이 국물에 김밥을 찍어먹고 있었다. 분식을 즐기며 조잘조잘 떠드는 모양새는 학교 다닐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은데. 어른들은 왜 이렇게 쉴 수 있는 날이 며칠 없을까.


알뜰살뜰 아껴 써도 늘 모자란 연차 말고, 어른들에게도 방학이 있다면 좋겠다. 긴긴 방학 뭘 하고 지내나 고민도 해보고, 혹시나로 시작해 역시나로 끝났다며 이번 방학도 늘어지게 게을렀을 뿐이라고 반성도 해볼 만한 그런 방학. 조금만 더 솔직함을 표현하자면, 기왕이면 육아 말고 혼자 쉴 수 있도록 여름, 겨울방학 말고 봄, 가을 방학으로 주어진다면 참 좋겠다. 아, 상상만 해도 짜릿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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