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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나의 음치

내 인생 최고의 가수

by 정벼리

더위에 잠시 멈춤 했던 캠핑짐을 다시 꾸렸다. 아이가 더 크기 전 여름 물놀이를 열심히 즐겨야 한다. 냉수가 찰랑찰랑한, 파란 수영장이 널찍한 키즈 캠핑장을 예약했다. 새벽부터 예약 사이트를 열어두고 사이버 오픈런을 달렸다. 요 근래 만난 모든 언니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엄마랑 놀아주는 시절도 이제 끝물이라고. 싸게싸게 놀러 다니라고.


한낮의 물놀이가 한바탕 훑고 지나간 캠핑장에서는 저녁이 되자 작은 페스티벌이 열렸다.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가 연신 흘러나왔다. 끼가 넘치는 한 어린이가 무대로 뛰어나가 리듬에 몸을 맡긴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춤사위가 요이땅을 외친 것처럼, 하나 둘 무대 위 작은 댄서들이 늘어났다. 무대 아래 남은 어린이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떼창을 시작했다.


한반도의 흥은 역시 다음 세대에도 이렇게나 유효하다. 그런데 여기, 미처 흥을 발산하지 못한 채 인파의 뒤쪽에서 쿨한 척 고개만 까딱거리는, 가슴속의 불꽃을 애써 감추고 있는 소녀가 하나 있다. 내 딸 별이다. 한때 장래희망이 무려 장원영이었던(아이돌 아니다. 장원영이다.) 이 소녀는 근래 들어 본인이 음악에는 영 재능이 없다는 현실을 자각해 버렸다. 어느 날, 학교에서 누군가 아이의 노래를 듣고 별이 너 음치구나, 라며 깔깔 웃었다고, 집에 돌아와 베개를 팡팡 때리며 울었다. 망할 녀석 같으니라고. 제깟게 뭘 안다고.


우리 아이는 무려 20개월에 첫 노래를 불렀는데, 여름 끝물에 리움미술관을 찾았을 때였다. 여름 내내 쇼핑몰만 도는게 지겨워졌었다. 우아하게 문화생활을 해보겠다는 의도와 달리,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데리고 미술관을 한 바퀴 도는 게 얼마나 힘이 들던지. 다녀본 사람만 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걷는 속도가 정해질 때에는 빠른 것보다 느린 게 곱절은 괴롭다. 관람을 마친 뒤, 아이고, 곡소리를 내며 카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쭉 들이키니 그제야 정신이 드는 듯했다. 잠시 숨을 돌리는데, 아이가 재잘댔다.


"엄마나노래할쭈알아(엄마 나 노래할 줄 알아)"


그맘 때 아이는 아직 말이 서툴러 단어와 단어 사이 휴지가 없었다.


"어이구, 우리 별이가 노래도 할 줄 알아? 무슨 노래할 줄 알아?"
"뎡그뚜쁠디나떠가자-"


아이는 E♭ 단일음으로 평상시 말투와 똑같이, 역시 단어 사이 휴지 없이 모든 말을 일렬로 붙여, 혀 짧은 소리로 타령을 하듯 끝 음만 길게 늘여 동요 악어떼(이요섭 작사작곡)의 가사를 주르륵 읊었다. 그게 우리 아이의 첫 노래였다. 나는 감격에 겨워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동영상 촬영을 하며 아이에게 한 번만 더 불러줘,라고 몇 번이나 부탁을 하면서 영상을 찍고 또 찍었다. 천사가 부르는 세레나데도 그보다 더 사랑스럽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나 빼고 아무도 노래인줄 몰랐지만.)


그런 아이의 노래를 두고 음치라니, 내가 기가 막혀서 원. 물론 객관적으로 우리 아이가 정박에 정음을 잘 못 맞추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세상은 정박에 정음을 못 맞추는 사람을 두고 음치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사실 또한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네가 누군지 내가 이름은 듣지 못했다만, 너 때문에 내가 그날 이후로 우리 아이의 꾀꼬리 같은 노랫소리를 영 듣지 못하고 있다. 오늘도 예전 같았으면 벌써 무대 한가운데 나가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댄스 삼매경에 빠져 있었을 아이가 뒤에서 소심하게 고개만 까딱거리고 있다니.


그때, 요즘 전 세계가 열광한다는 케데헌 OST가 흘러나왔다. 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아이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여전히 쿨내 풀풀 모드를 가장한 채, 고개만 까딱까딱 리듬을 탄다. 귓가에 대고, 같이 노래하자, 속삭였다. 아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한 번만, 엄마 소원이야, 다시 속삭이고 부러 더 큰 소리로 노래했다. 못 이기는 척 개미 목소리로 노래를 읊조리던 아이는 점점 목소리가 커지더니 노래의 클라이맥스에 이르자 음악에 도취되어 눈을 감은 채 Up Up, 목소리를 높였다. 묘하게 반음 내려간 희한한 음계로.


아, 이거지. 세상의 기준에 좀 못 미치면 어때. 너는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내 인생 최고의 가수야. 언제나 짜릿한 나의 사랑, 나의 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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