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장화를 신고 걸으면 어떤 기분일까?
흔하디 흔한 장화이건만, 한 때는 너도나도 비가 오지 않아도 유행처럼 신던 신발이건만, 나는 장화를 가져본 적이 없다. 샛길로 빠진 얘기지만, '신어본 적이 없다'라고 적었다가 '가져본 적이 없다'로 고쳤다. 갯벌체험에 가서 작업용 장화를 빌려 신었던 기억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늘 나의 장화에 대한 작은 이야기는 그래도 아직 유효할 테다. 아무렴, 비 오는 날 장화를 신고 걷는 느낌이 갯벌에서 장화를 신고 걷는 느낌과 같을까. 뭐, 안 해봐서 모르지만.
보통 초등학교 때 장화 한 켤레쯤 가져보기 마련인데, 나는 못 가져봤다. 초등학교에 갓 들어갔을 때였나, 시장인지 마트인지 어딘가에서 노오란 장화를 보고 엄마아빠에게 저걸 사달라며 졸랐던 기억이 난다. 아빠는 우리 큰딸이 학교도 들어갔으니 장화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반색을 했는데, 문제는 엄마였다. 내 기억 속 그날의 엄마는 비정하리만큼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장화는 덥고, 빗속에서 장난치다가 장화 안에 물 들어가면 양말 더 젖어."
아빠는 언제 당신이 장화 하나쯤을 이야기했냐는 듯, 곧바로 엄마 입장에 동조했다. 장맛비가 오는 날에는 학교에 갈 때 가방 앞주머니에 손수건과 여분의 양말을 챙겨가라며, 실내화를 갈아 신기 전에 물을 닦고 새 양말을 신는 편이 낫다며 나를 설득했다. 그때의 나는 부모님 말씀에 곧잘 수긍하는 어린이였기에, 그날 이후로 장화를 사달라는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친구들이 더 이상 등굣길에 장화를 신지 않는 나이가 될 때까지, 비 오는 날 우산과 장화를 깔맞춤으로 차려입은 친구가 보이면 내심 그렇게 부러웠었다.
앞코는 동그랗고
목은 귀엽게도 반듯하니 올라와서
알록달록하고 매끈매끈한,
비 맞으면 더 사랑스럽게 빛나는 예쁜 장화.
어른이 되어서 한참 장화가 유행할 때 나도 하나 사볼까 싶은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실행에 옮긴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려서도 안 신었던 것을 다 커서 산다고 하니 어쩐지 쑥스러운 느낌이 들어서였다.
대신 나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장마철이 다가오면 아이의 맘이 쏙 드는 장화를 하나씩 장만해 주었다. 노란색, 분홍색, 꽃무늬, 리본장식을 거쳐, 이제 좀 컸다고 이번엔 아무 장식 없는 귀여운 연보라색 장화를 고르더라. 내친김에 우산도 깔맞춤으로 장만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마트를 아무리 돌아보아도 아이가 고른 장화와 꼭 맞는 연보랏빛 우산이 없는 거다. 조금 시무룩해진 나에게 아이가 말했다.
"엄마, 요즘 누가 촌스럽게 깔맞춤을 해. 우산은 투명우산이 제일 안전하대. 집에 있는 투명우산 쓸게."
그렇지, 어린이 우산은 투명우산이 가장 안전하지... 맞는 말이긴 하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요전 날 아침, 일부러 출근시간을 늦춰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고운 새 장화를 신고 찰방찰방 잘도 걷는 예쁜 발놀림을 바라보며, 나는 물었다.
"장화 신고 걷는 건 어떤 기분이야?"
아이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기분이 어딨어. 그냥 비 와서 질척 질척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