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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밋밋했으면 좋겠어요

평범한 하루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by 정벼리

누군가 물었었다. 아이가 커서 어떤 삶을 살았으면 좋겠냐고. 그땐 아직 아이가 어릴 때라 아이의 미래까지는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야기했다.


"그냥 밋밋하고 재미없을 정도로, 그저 평탄했으면 좋겠어요."


아이가 커서 어떤 친구를 만나고, 어떤 남편 또는 애인을 만나고, 어떤 공부를 해서 어떤 직업을 가질지 아직도 도무지 알 수 없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는 어제와 오늘이 다른 법이니까. 하지만 저 말만큼은 달 뜨는 밤에 (아파트인 우리 집에는 있지도 않은)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두 손 모아 매일이라도 빌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사무치게 진심이다.




밋밋하고 재미없고 그저 평탄한 인생은 아이에 대한 바람만은 아니다. 내 남은 인생도, 그리고 남편의 인생도 그저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엄청나게 큰돈을 벌지 못해도 괜찮고, 대단한 일을 해내지 못해도 아무 상관없으니 큰 사고 없이 그저 무탈하게. 나는 남편에게 편히 쉴 그늘이 되어주고, 남편은 나에게 기댈 나무가 되어주며, 우리는 아이에게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주고 싶다.


하루를 살아내고 저녁에 다시 모여
오늘 어땠어,라고 묻는 질문에
오늘도 어제처럼 그냥저냥 괜찮았어,
딱 이 정도로 대답할 수 있는 매일이 우리에게 허락되길.

어렸을 때엔, 이다음에 커서 어른이 되면 남다르고 비범한 생을 살고 싶기도 했다. 히어로처럼 악의 무리에 용감하게 맞서 정의를 수호하는 거친 하루하루를 소원한 날도 있었고,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새겨질 아름다운 예술을 혼을 태워서라도 남기고 싶었던 날도 있었다. 뭐, 막상 어른이 되고 나니 (나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는 진실은 잠시 제쳐두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내가 책임져야 할 가족이 생기면서부터 차츰 생각이 변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이 지구상에는 우리의 별 탈 없는 일상을 파괴할만한 위협이 너무나 많다. 갑작스러운 사고, 질병, 성적, 입시, 취업난, 쥐꼬리 만한 월급, 올라가기만 하는 물가, 출산과 육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 인생에 뛰어드는 빌런들까지. 이런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지금껏 엄청난 충격파에 휩쓸리지 않고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살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른다. 넘어지려 할 때마다 나를 움켜 잡아준 수많은 손들을 향해, 새삼 조용한 감사의 인사를 보내본다.


그리고...


쓰러지지 않고 오늘을
뚜벅뚜벅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그리고 세상 모든 평범한 이들에게
무탈의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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