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인지 너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은 삶을 살면서도 가끔 잊을 만하면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연락이 와서는 서로 안부를 묻곤 했어. 그러던 어느 날 너는 난데없이 복싱을 시작했다고 했지. 나는 정말로 뜬금없었어. 너는 복싱은 힘들지만 재미있다고 했어. 올바른 자세를 잡는 것이나 체력의 한계에 닿을 때까지 땀을 흘리는 것 같은 게 그렇게 재미있다고. 잘은 몰랐지만 아마 그때 너는 또 얼마 가지 못한 연애를 막 끝냈을 때였고 나는 네가 복싱을 시작한 게 그걸 잊기 위해서 단지 마음을 다른 데 쓰기 위해서 그런 거로 생각했어. 왜 전에도 그랬잖아. 정말로 좋아했다던 아이와 헤어지고 대뜸 여행을 가야겠다고, 그것도 될 수 있으면 아주 먼 곳으로. 그 말만 남기고 인도로 휙 떠나버린 너였으니까. 너는 쉴 새 없이 복싱에 대해서 이야기했어. 재비 나 스트레이트 같은 복싱 기술에 대해서, 같이 연습하는 사람의 습관에 대해서, 엄하면서도 사려 깊게 꼼꼼히 챙겨주는 트레이너에 대해서. 늦은 시간까지 상대방은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 같은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네가 지금 빠져 있는 것에 대해서 늘어놓았어. 나는 재미있느냐고 물었고 너는 어린아이의 천진한 표정으로 이것 이상으로 좋은 게 없는 것 같다고 대답했지. 너는 그렇게 아마추어 복서로서의 모습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어. 그 세계에 흠뻑 빠져있는 너의 모습은 신기하기도 하면서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는데.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잠시 틈이 생겼을 때 너의 표정은 왜인지 지쳐 보였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괜찮으냐고 물었고, 너는 괜찮다고, 참을만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참을만하다는 말은 많이 아프다는 말. 네가 말했던 괜찮음이 복싱이 괜찮다는 것이었는지, 너와 내가 보내고 있는 청춘이라는 녀석에 대한 괜찮음 이였는지. 괜찮다, 괜찮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다.라고 말하는 너는 여전히 불안해 보였고. 아마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2.
몇 년이 지났는지, 비가 오는 날이었어. 너에게 오래간만에 연락이 와서는 바쁘지 않으면 얼굴이나 보자고. 그래서 우리는 늘 만날 때면 가곤 했던 식당에서 만나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내리는 비를 바라봤어. 날씨가 흐려서 그랬는지 아님 비 때문이었는지. 너의 표정이 조금은 어둡다고 느껴졌어. 요즘도 복싱하고 있는지 내가 물었고 너는 고개를 저으며 복싱은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말하며 씩 웃었어. 그 말을 들은 나는 조금 놀랐어. 이번에는 다른 때와는 다르게 정말 오랫동안 열심히 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너는 그만뒀다고,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을 때의 심정 같다고, 정말 좋아했기에 그게 더 힘이 들었다고. 누군가에게 맞는 것은 너무 아픈데, 때리는 것은 더 아픈 것 같다고. 제대로 때리지 못하면 복싱에서는 맞고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때리는 건 어려운 것 같다며. 그런 말을 하는 너의 모습은 슬퍼 보였어. 아마 누구도 진심으로 때려본 적 없는 너는, 사람으로부터, 혹은 세상으로부터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는 생각이 들자 살짝 콧등이 시렸어. 아프고 싶지 않아서 자신을 더 학대하는 것 같아 보였거든. 나는 그러길래 복싱 같은 건 왜 좋아해서 자신을 괴롭고 힘들게 했던 건지 물었고 너는 글쎄... 그냥 좋았으니까. 처음부터 무척 좋아했으니까.라고 말하던 너는 목이 멨는지 술잔을 비웠어. 그날 우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말이 없었어. 식당 밖을 나올 때에도 비는 쏟아져 내리고 있었지. 내라던 비를 주룩주룩 다 맞은 채 힘없이 돌아서서 이번에는 네가 나에게 물었어. 괜찮을 수 있을까?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고. 너는 말없이 계속 걸었지. 괜찮을 거야, 아마 너의 이야기는 대단한 영웅담이나 극적인 성공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냉소주의자의 넋두리 혹은 비관론자의 절망 대상은 아니야. 그거 알아? 우리는 불완전하고, 세상은 너무 빠르게 돌아가. 그래서 자주 흔들리고 넘어지고 좌절하기도 하고. 무엇이 너를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는 나는 잘은 모르지만. 그래서 별거 아닌 것처럼 그저 힘내라고 말하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때로는 두들겨 맞더라도, 다리가 풀려서 덜덜 떨릴지라도.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나자. 10을 다 셀 때까지 누워 있기엔 바닥이 너무 차갑잖아.
3.
매기가 다운되었을 때. 마음속으로 소리치고 또 소리쳤어. 일어나. 일어나... 안 돼. 맙소사... 말도 안 돼. 하지만 현실은 너무 무겁고 받아들이기 쉬운 것만은 아니었어. 매기는 왜 자신을 스스로 힘들게 하면서 꿈을 붙잡고 놓지 못했던 걸까. 어떻게 자신만 볼 수 있는 꿈 때문에 모든 것을 건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건지. 문제는... 너무 좋아해서 그렇다고. 그래서 지금이 늦은 거라면 아무것도 없는 거라고. 그래서 죽기 살기로 뛰어들고 또 넘어지면, 그땐 어찌하려고 그러는 건지. 쓰러지면 모든 것을 다 잊고 그냥 쉬고 싶어 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세상과 또 치열하게 싸우고 부딪히며, 뭐가 올바른 건지 어떤 선택이 과연 맞는 것인지 그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건 원래 세상이 그래서 그런 거야. 복잡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복잡하고. 쉽게 생각하면 제법 쉬워. 너무 어렵게 너무 힘들게 생각하며, 고민하며, 후회하며. 자신을 힘들게 만들 필요는 없어. 자기 자신을 지키면 되는 거야. 흐려지지 않게, 사라지지 않게. 그렇게 소중한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면 돼. 어쩌면 그걸로 충분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거나 힘없이 한숨을 내쉬지 않아도 괜찮아. 자기 자신을 보호해. 자신을 버리고 던져야만 소중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듯 자신을 불태워버리지 마. 물론 때로는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사람이 있어. 이게 마지막인 것처럼 절박한 사람이. 그 절박함 때문에 살아가고 바로 그 절박함 때문에 다른 것들을 전부 포기해 버리는 그런 때도 분명히 있어. 많은 예술가가 칭송받는 건 그들의 무한한 결핍 때문일 거야. 결핍을 채우기 위한 절박함에서 나오는 예술적 창작물은 사람들에게 묘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니까. 그건 자기 자신을 태워서 만드는 행위라서. 끝없는 결핍 뒤에 나오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무의미한 행동. 언제나 고통 속에서, 슬픔 속에서, 그 자신은 죽어간다 할지라도. 무언가가 마지막으로 불타오르는 모습은 아름답거든. 다 타고난 뒤에는 남는 것이 없어도. 마지막까지 불태워질 때의 강렬한 빛을 내뿜는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빛으로 스러져 가는 거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 이야기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끝을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완전히 검어지지 못한 밤하늘이 푸른 검은색으로 깊어질 때마다. 다시금 생각하곤 해. 지금 그걸로 충분하냐고, 정말 그런 거냐고. 그래서 홀로 조그마한 방에 틀어박혀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그렇게 버티고, 견디고, 힘겹게 숨 쉬고 있는 거냐고. 정말 괜찮아? 아직 살아있는 거야? 눈물도 감정도 모두 잘 지내? 별들이 허물어져 쏟아져 내리는 밤. 그렇게 스스로 오므라들어 천천히 사라지는 자신의 빛을 바라보며. 괜찮다고 힘없이 위로해.
Million Dollar Baby (2004)
Director - Clint Eastw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