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츠신 [삼체 0: 구상섬전]
*스포일러 주의
알라딘에서 삼체 시리즈의 프롤로그격인 구상섬전이 국내에 발간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펀딩 당시에는 전자책으로 나오면 읽어야겠단 생각에 구매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김초엽 작가의 신간인 양면의 조개껍데기를 종이책으로 구매하게 되면서 함께 장바구니에 넣었다.
한번 책을 읽기 시작하면 웬만해선 손에서 놓지 않는다. 따라서 구상섬전도 여유롭게 독서할 시간이 생기면 읽어야겠다고 생각해서, 한동안 책장에만 꽂아두었다. 올해 초, 드디어 맘 편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1월 말부터 읽기 시작해 또 단숨에 읽어내렸다. 초반에는 두꺼운 종이책을 가방에 넣고 다녔지만, 아무래도 무겁고 요즘 지하철에서는 꺼내기도 힘든 책이라 밀리의 서재로 갈아탔다. 밀리에 공개된 덕분에 가벼운 루나x를 들고 다니며 시간 공간 제약 없이 언제든 읽고 싶을 때 읽을 수 있었다.
삼체 시리즈 대망의 첫 번째 이야기, 구상섬전.
구상섬전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광인(狂人)’이다. 마치 광증에 걸린 것처럼, 다들 자신이 미쳐있는 것에 일생을 바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린윈’이다. 구상섬전으로 부모를 잃었던 ‘천’의 일인칭으로 쓰였지만,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은 그라고 확신한다.
그의 광기는 예상과 상상을 초월한다. 진작에 어딘가 고장 나 있는 사람이 끝까지 고쳐지지 않는다는 점이 그를 완성한다. 린윈의 존재는 주인공 천을 끊임없이 갈등시킨다. 곧은 나무가 먼저 베인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린윈은 부러지지 않을 강철로 되어 있는 것만 같다. 린윈의 신념을 더 굳혀버린 것은 자신이 믿고 아꼈던 것이 가장 큰 배신을 안겨줬을 때다.
어쩌면, 그가 부러짐은 그의 의지가 부러졌기보다 그의 인생이 부러진 것일지도. 어떻게든 그를 보호하고 아꼈던 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렸으니 말이다. 양자가 되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한 사람들이 미친 추종자들이라는 게 린윈의 인생이, 아무리 자신의 믿음을 위해 뛰어난 기술을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나라를 말아먹은 여자”로 납작하게 뭉뚱그려지게 만든다.
누군가는 무언가에 미쳐서 살아간다. 천이 구상섬전에 미치고 딩이와 린윈이 무기에 미친 것처럼, 일평생 그것을 붙든다. 미친다는 말로 해석되는 영단어는 여러 개다. 친숙한 crazy, mad부터 enthusiastic, passionate, fanatic, lunatic같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쓰이는 표현들까지. 무엇에 미치든 상관없다. 다만 그것에 어떻게 미칠 것인지는 다른 이야기다. 광기에 사로잡힐 때, 그 광기로 인해 천 박사처럼 될지 린윈처럼 될지를 정하는 건 바로 나 자신이리라. 삶에서는 무엇에 미칠지보다 어떻게 미칠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자학이나 양자역학을 잘 모르다 보니 과학적인 내용들은 흐린 눈을 하고 읽었다. 인물들이 결국 구상섬전을 발생시켰고 거기서 거품을 발견했고 그 거품 덕분에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져서, 전시에는 무기가 된다면 일상에서는 토네이도를 관측할 수 있는 기술이 되기도 한다는 정도로만 이해했다(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까진 작가가 과학적 이론으로 구상해 낸 것일 텐데 마지막에 나온 거울은 유일한 판타지로 느껴지고 현실감이 없었다. 물론 책이 나왔던 04년도보다 22년이 지난 현재에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구상섬전에 대해서 작가가 상상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마치 삼체 2부와 3부처럼. 특히 3부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했다.
구상섬전은 중국식 표현으로, 국내 정식 표기는 구전球電이다. 구(球, sphere)의 형태를 가진 번개를 의미하며, 중국어에서 불리는 이름은 조금 더 그 설명을 명확하게 사자성어처럼 짚은 단어다(‘구球’의 형’상’形状를 한 ‘섬’광閃光같은 ‘전’류電流). 영어로는 더 직관적이다. Ball Lightning. 공 모양 번개다.
지구상에 이런 자연현상이 존재한다는 걸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작년에 밥 친구로 자주 틀어놓았던 유튜브 채널이 있다. 다양한 분야의 박사님들을 모셔놓고 중구난방으로 지식 설파를 하는 ‘보다BODA‘이다. 오랜만에 보다를 밥 친구 삼아 처음으로 과학을 보다의 에피소드 하나를 틀었다. 천문학으로 유명한 지웅배 님이 구전을 소개하고 있었다.
영상 속 구 모양 전기가 CG가 아니라 자연현상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왜 인간들이 ‘도깨비불’이나 ‘여우불’ 같은 신비스러운 존재를 믿게 됐는지도 알 것 같았다. 작가 류츠신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가득한 이 ‘움직이는 구 모양 전류’를 양자역학과 SF의 세계에 접목했고, 그가 가진 과학적·공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매력적인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삼체가 더 먼저 구상되고 이 구상섬전이 그 이후에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류츠신이라는 작가가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에는 끝이 없을 것만 같다. 와중에 드라이하면서도 시적인 문체가 류츠신의 작품 세계에 밑도 끝도 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다. 이야기의 끄트머리에 나오는 파란 장미꽃은, 어찌 됐든 이 이야기가 로맨스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 인스타에 올릴 후기를 썼더니 글자수 제한 때문에 다 싣지를 못 해서 브런치에도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