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나 돌봄 중독이야.

by 한걸음씩

정신과에 들렀다.

남편이 집 나가기 두어 달 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처음엔 매주 다니던 것이 지금은 약도 많이 줄었고 기간도 3주에 한 번꼴로 간다.


정신과라는 곳이 상담을 깊게 하기는 어렵기에 약처방을 위한 것이고 기껏해야 10분도 채 안되어 진료실을 나온다.

그러나 10분 남짓 되는 상담시간을 나는 잘 활용하는 편이다.


-요즘은 어떠세요?


의사는 늘 같은 질문을 하고 나는 간단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몇 가지 사건을 떠올리려 애쓰곤 한다.

그것이 상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할 얘기가 분명했다.

작년에 방송사연에 채택되어 L교수와 라디오 상담했던 음성파일을 다시 듣고 느낀 점과 수년 전 남편에 대해 썼던 나의 일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일기를 봤어요.

꽤 오래전인데 그때도 남편은 지금과 다를 바 없이 살았더라고요.

긴 세월 동안 어쩌면 그렇게 변함이 없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작년에 라디오 상담했던 내용을 다시 들었는데, 그때는 전화상담에 너무 집중하느라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이번에는 들렸어요.

그 교수님이 저를 정확히 진단하셨더라고요.


눈을 반짝이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표정으로 의사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제가 공동의존이고 돌봄 중독이라는 말이요.

정말 제가 그게 좀 심한 거 같아요.

남편은 절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에 그때는 남편과 살아보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도박에서 쾌감을 느낀다는 말이 좀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남편에 대한 연민이 전보다 많이 가벼워졌어요.


남편이 자꾸 도박장으로 향하고 절제하지 못하는 것을 중독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게 아닐까 자책 했었다.

내가 마음을 잡아주지 못해서, 혹은 내가 불편하게 해서 등 뭔가 내가 잘하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던 것 같다.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라디오방송 상담에서 나는 그런 말도 했었다.

이혼하면 남편은 자기 자신도 돌보지 않고 노숙자가 될 텐데 너무 불쌍하지 않냐고.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남편은 집을 나가면 절대 먼저 연락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내가 액션을 취하지 않으면 별거가 오래갈 것 같다고 했더니 의사는 알아서 잘 살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동안은 내가 챙겨 줬기 때문에 나를 의지한 것이고,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는 건 혼자서도 살만 해서 그런 게 아니겠냐고 했다.

그렇지.

남편은 그동안 수차례 가출 했을 때도 죽지 않고 돌아왔지.

나 혼자 궁금하고 불안했던 것이지.


중독자 아버지를 둔 자녀들은 상대적으로 엄마에 대한 의존성이 강하니 성인이 되었다면 꼭 독립시키라고 L교수는 말했었다.


다행히 아들은 이미 그전에 스스로 독립했었다.

아빠 없이 사는게 너무너무 좋다고 하면서.


그러나 딸은 독립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의사는 L교수가 말한대로 딸을 독립시키는 것이 맞다고 했다.

헌신적으로 해주는 내가 바뀌어야 딸이 독립하고 싶을게 아니냐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어벙벙한 표정으로 멍하게 보고 있으니 의사가 몇 가지 예를 들며 설명했다.


-집안일도 분배하시고, 자기 옷은 스스로 빨게 하시고요.

생활비도 좀 더 올려서 받으세요.

그럼 나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따님도 남편과 똑같아요.

해달라고 한 적 없지만 해주니까 받으며 누리는 거죠.


마지막으로 의사가 던진 말이 내 마음에 제대로 꽂혔다.

해달라고 한 적 없지만 해주니까 받았다는 말을 하는 의사의 얼굴은 더없이 다정하고 친절했지만 나는 몽둥이도 한대 세게 맞은 것 같았다.


AI이미지

상담실에서 나와 소파에 멍하게 앉았다.

내가 딸에게 해주고 있던 일들이 속도를 내며 휙휙 스쳐 지나갔다.

벗은 옷을 세탁해서 일일이 개켜 방에 들여놓아 주고, 먹고 싶다고 카톡을 하면 저녁 식사 때 바로 만들어주고, 집안 청소나 설거지는 물론 분리수거조차 딸이 싫어하면 시키지 않았다.

남편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딸에게 하고 있었다.

전업주부도 아니면서 전업주부보다 더 완벽하게 가사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나는 가족이라기보다 관리자로 있으면서 서로의 경계를 허물었다.


딸의 감정에 지나치게 깊게 들어가서 정서적 안전요원 역할을 하다 보니 과잉 돌봄이 되었고, 나의 불안이 그대로 딸에게 전달되는 역효과를 낳았다.

그러니 딸은 나에게 지나치게 의존했고, 나는 불안해서 딸을 놓지 못하며 서로를 안전장치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 에너지만 빼먹는 게 아니었다.

딸도 나의 불안을 보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공사 중이다.

60년을 지내왔으니 대대적으로 뜯어고쳐야 하는 대형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남편의 도박 중독에서 시작한 공사는 딸과의 관계를 넘어 나의 근간까지 흔들며 휘청이게 하고 있다.

그러나 뿌리는 전보다 튼튼해져서 이제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딸을 독립시키라고 했지만 당장 독립이 쉽지 않기에 함께 살면서 조금씩 분리하려 한다.

집안일도 내가 한 가지를 하면 딸에게 작은 일이라도 맡겨야겠다.

미덥지 않아서 '내가 하고 말지'했던 습관을 버린다는 게 나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딸과의 관계를 재정렬하기 위해 쉽지 않은 그 길을 가보려 한다.


당장 실천에 옮겼다.


간단했지만 고민하며 보냈는데 딸은 쿨하게 대답했다.

마음 상하지 않을까 염려했던건 그냥 기우였다.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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