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신과 환자다.

by 한걸음씩

별거의 가장 큰 소득은 나와 남편의 객관화였다.

남편과 한집에 살면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별거 한지 겨우 7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내 불안상태는 정말 많이 달라졌다.


처음 별거를 시작할 무렵 나를 무겁게 짓눌렀던 감정은 측은지심과 죄책감이었다.

싸우더라도 집에 있어야지 내 손을 떠나면 남편이 형편없이 망가질 것 같았다.

몰골은 노숙자보다 더 허름한 노인이 될 것이고, 자동차와 관련된 것들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해 운행도 못할 지경이 될게 불 보듯 뻔해서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저러다가 죽기라도 하면 남편을 내보낸 나 때문일 거라는 죄책감에 사로 잡혀 지옥을 살게 되겠지.


정신과 의사와 상담사는 물론 딸과 아들까지 나에게 못 말리는 걱정병 환자라고 했다.

정작 나는 그들이 남편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럴 거라며 남편의 안부가 걱정돼서 안달을 했다.

딸은 내가 참지 못하고 남편에게 연락해서 재결합할까 봐 가위가 늘릴정도라고 했다.

나보다 딸이 더 남편과의 동거를 힘들어했다는 걸 알지 못했더라면 남편에게 먼저 꼬리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딸이 상처받고 살았다는 것과 내가 공동의존증과 돌봄 중독 환자라는 두 가지 이유가 내 결심을 유지하게 했다.


남편이 집에 없으니 더 이상 잔소리를 할 수도 없고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진짜 문제가 있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 시간이 날 때마다 나의 병에 대해 검색하며 공부했다.

처음엔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고, 내 행동과 매우 흡사한 증상들을 보며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했다.

도박 중독자 남편이 지내기에 최적화된 환경을 만든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건 정말 소름 끼치게 싫었다.

그걸 지금까지 누리고 살았던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의 마음도 올라왔다.


바보같이 나는 왜 상담받을 생각을 못했을까.

남편의 중독만큼이나 나도 내 확신에 중독되어 다른 사람들의 충고나 권면을 무시했다.

누르고 누른 감정들이 포화상태가 되어서야 겨우 손 내밀고 구원요청을 하며 상담을 시작했다.

내 안에 남은 마지막 에너지를 나를 살리는 데 쓴 것이다.


피부가죽처럼 찰싹 들러붙은 남편에 대한 굴절된 책임감을 떼어 내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불쑥불쑥 불쌍한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고, 내가 지금 옳은 판단을 한 건가 하는 의심이 끝없이 머릿속을 헤집어놨다.

남들에게는 상담교수나 정신과 의사들의 말을 따다가 맞는 말을 잘도 해댔는데 정작 나는 의사의 진단과 처방까지도 무시했다.


요즘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글로 옮기면서 한걸음, 두 걸음 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멀어지니 이제야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돌봄 중독은 도박중독자인 남편을 만나서 생긴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돌봄 중독으로 인해 남편을 떠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로 가본다.

외도로 부재중인 아버지대신 가장 역할을 했던 엄마.

나는 한 번도 엄마가 나의 보호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돌봐야 할 불쌍한 사람, 엄마에 대한 나의 마음이었다.

엄마라는 어른을 돌보기에는 너무 무력한 어린아이였지만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 싶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고작 야간작업으로 늦게 퇴근한 엄마를 위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집안 청소나 부엌일을 해 놓고 엄마가 올 때까지 기대를 안고 기다리는 것이다.


퇴근한 엄마의 안색을 살피며 엄마의 시선이 닿는 곳을 따라 긴장된 마음으로 내 시선도 따라갔다.

칭찬에 인색한 엄마가 화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의 하루는 만족스러웠다.

나는 오직 엄마를 위해 일하는 게 삶의 이유였는데, 똑같이 집안일을 했던 동생은 청소가 지겹고 하기 싫었으나 엄마의 잔소리는 더 싫었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인정머리 없다고 여겨졌던 동생이 오히려 건강하게 표현하며 산 것 같다.

그때는 동생도 나도 초등학생이었다.


나는 왜 유난히 엄마의 표정과 기분에 집착했을까.

6남매 중 내가 가장 심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낮은 자존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6남매 중 나는 주워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 외모가 달랐다.

예쁜 엄마의 어느 한구석이라도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었다.

오죽하면 나를 낳은 엄마도 대놓고 못생겼다고 했을까.

엄마는 내가 아기 때 데리고 나가면 너무 못생겨서 사람들이 보고 웃었다며 집에 맡기고 다녔다고 했다.

하지만 마음씨 하나만은 누구 못지않게 착하다는 말에 가스라이팅이라도 당했는지 심부름도 도맡아 했고, 시키지 않아도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었다.

착하기 위해 집안일을 했고, 착하기 위해 공부도 했다.


책도 구하기 힘든 그때 나는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독서가 좋은 게 아니고 책을 읽는 시간만큼은 나는 이 세상에 살지 않았다.

책 속의 세계로 들어가면 못생긴 나도 예쁘고 사랑받을 수 있었고, 때로는 나처럼 못난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함께 울기도 했다.

어쨌든 나의 피난처는 책 속의 세계였다.

결혼 후에는 책이 영화로 바뀌어 힘들 때마다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전쟁고아처럼 나의 모든 감정은 그렇게 내 안에서 스스로 처리되었다.


'나는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태우고 녹여내느라 힘들었어도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고, 비교적 나는 괜찮은 편에 속한 줄 알았다.

1등을 해도 칭찬하는 사람이 없고, 꼴찌를 해도 나무라지 않는 환경에서 인정에 목말라 못할 것이 없던 그때의 내가 조금 슬프다.


이렇게 아픈 내가 더 아픈 남편을 만나 가정이라는 것을 이루었으니 그 가정이 온전했을까.

도박중독자를 나에게 보낸 시부모님이 요즘 원망스럽다.

그러나 알고 있으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시부모님이나 그런 남편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여태 방치했던 나나 다를 게 없다.


나는 지금도 어릴 적 나의 엄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코 앞에 퇴직한 오빠가 살고 있어도 더 멀리 있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도움은 주로 형광등 갈기나 변기 수리와 같이 오빠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빠한테 말해. 나는 근무 중이잖아."


처음 그 말을 할 때 아주 독하게 마음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다 그만두라며 버럭 화를 내고 전화를 끊었고, 나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었지만 다시 연락하지 않고 기다렸다.

결국 아쉬운 엄마는 오빠한테 연락했는데 오빠는 당연하다는 듯 흔쾌히 일처리를 해 주었다.

엄마의 말에 맹목적으로 순종한 내 잘못이 더 크다.


아직도 가끔 나에게 부탁을 하지만 자연스럽게 오빠에게 다시 연락하라고 한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해 낸 것 같아 대견하다.

엄마를 거절해도 된다.

내가 하지 않는다고 그 일이 미처리 상태로 방치되는 건 아니다.

세뇌하다시피 해도 아직 엄마의 염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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