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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걸음씩 Mar 11. 2024

돈과 이혼 할 준비

[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은 나르 모르고]

"자기야. 어떡하지?  회사가 부도를 냈어"

여느 때처럼 빌라 엄마들과 모여 애들은 애들대로, 엄마들은 엄마들대로 밥도 해 먹고 재미있게 즐기던 평화로운 낮시간에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남편은 어떤 상황에서도 좀처럼 감정이 요동하지 않는다.

전화기 너머 들리는 남편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그래서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감정기복이 널 뛰듯 심해서 마치 조울증 환자 같은 나는 모인 엄마들이 다 알 정도로 사색이 됐다.

놀던 자리를 어떻게 정리했는지도 기억에 없고, 그 후 며칠은 내 기억에서 증발해서 전혀 생각이 안 난다.



당좌수표의 결제일이 되자 친정집은 난리가 났다.

사채업 하는 사람의 성격이 온순한 경우는 별로 없겠지만 엄마를 통해 소개받은 그 아줌마는 성격이 유별나기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성대 사이에 얇은 철판이라도 끼워놓는 것처럼 목소리 톤이 높고 얇아서 멀리서도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고, 작은 소리는 낼 줄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은 홍조까지 있어 방금 술자리에서 나온듯한 술톤 빛의 인상이 강했고, 배는 만삭의 새댁만큼이나 튀어나와 꼬질꼬질한 몸빼바지를 명치까지 치켜올려 입고 다녔다.

배를 실룩거리며 걷는 모습을 동네에서 몇 번 봤을 때 '돈도 많다면서 저러고 다닐까'하는 생각을 하며 은근히 무시했었는데 이렇게 입장이 바뀌어 그 사람에게 선처를 구하며 빌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줌마는 부도수표라는 것을 알고 난 뒤 마치 자기 집문서라도 빼앗긴 사람처럼 엄마에게 찾아와 찢어지는 목소리로 동네방네 다 들리게 떠들면서 협박했다.

"당장 돈 안내 놓으면 내가 바싹 말려 죽일 거야. 가만 놔둘 줄 알아??!!"

싸움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엄마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딸 대신 조금씩이라도 갚겠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무조건 일시불로, 그것도 당장 갖고 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무것도 모른 채 딸이 부탁을 하니 아줌마를 소개만 했을 뿐인데...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와서 엄마를 못살게 하니 이러다가 엄마가 비명에 가시겠구나 싶었다.


우리 집은 우리 집대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임금을 받지 못한 일꾼들이 집으로 찾아와 문을 발로 차고 주먹으로 치고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들이 우리 집에서 일어나니 동네 창피하기도 하고 불안해서 사는 게 지옥 같았다.

큰소리에 놀란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혹시나 밖으로 새어 나가 듣게 될까 봐 현관에서 가장 먼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고 있었다.

친정으로 피난이라도 가고 싶지만 친정은 친정대로 전쟁터 같으니 있으니 갈 곳도 없었다.


남편은 일이 터지고 난 후 외박을 자주 했고 집에 들어와도 옷만 갈아입고 나갔다.

내가 갖고 있던 비자금도 다 수표환전에 써버렸으니 이제 남은 거라고는 전세 보증금밖에 없었다.

집주인에게 연락해서 이사를 하겠노라 했다.

다행스럽게 집이 깔끔하니까 금세 입주할 사람이 구해졌고, 야반도주하듯 우리는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한 집도 새로 지어 깨끗하기는 했으나 예전 살던 집의 절반 크기밖에 안 되니 큰 살림은 모두 버려야 했다.

월세가 무리가 되더라도 집만은 깨끗한 곳으로 가고 싶었기에 크기는 따질 형편이 못되었다.

허름한 집으로 가면 인생 자체가 망한것 같기도 하고 다시는 벗어 날수 없을꺼라는 생각이 들어서 못 견딜 것 같았다.

대지 17평에 지은 집이니 그 크기야 말해 무엇하랴.

1층과 2층은 각층 1세대씩 단독가구였지만 지하는 그나마 작은 집을 둘로 쪼개어 각각 방 하나씩 두세 대를 만들었는데 주인은 그중 한세대에 살고 있었다.

집주인은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얼핏 보아도 60대 중반은 넘어 보이는 얼굴에 허리가 굽고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깡마른 몸에 말투는 어눌했지만 성격이 꽤나 까칠해 보이는 독신녀였다.


낡은 집을 새로 짓느라 들인 공사비는 전세 보증금을 받아 지불을 한상태라 우리 집만 월세로 남은 것이고 자신은 그것이 유일한 수입원이니 날짜를 절대 어기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놨다.

남편도 월세는 갖다 주겠노라 약속을 했기에 나도 주인에게 염려하지 마시라고 안심시켰다.

그래도 믿음이 안 갔던지 어디서 이사 오는 거냐, 왜 여기로 왔냐 꼬치꼬치 물었고 순진한 나는 있는 대로 대답을 했더니 그럼 월세 못주는 거 아니 나며 계약을 무르려고 하는 통에 애를 먹었다.


처음 1년간 남편은 약속대로 월세가 밀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환전하느라 진 빚도 남아있고, 남편이 지불하지 못한 임금도 마찬가지라 늘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가 하나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남편의 외박은 잦았고, 결혼 전부터 재미로 하던 화투방까지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런 남편을 찾으러 정신 나간 여자처럼 여기저기 다니기도 했고, 집에 오면 죽일 듯이 서로 싸우기도 했지만 나아지는 것 없이 두 아이에게 불안감만 심어주는 것 같아 죽고 싶도록 괴로웠다.

이렇게 집에 있다가는 우울증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길 것 같았다.

큰 아이를 놀이방에 보내 놓고 둘째를 업고 무작정 밖에 나가 돌아다녔다.

피곤하기라도 해야 저녁에 잠을 잘 것 같았기에 몸을 혹사시키듯이 여기저기 다녔다.


"야, 00야!  너 어디가?"

하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같은 교회 다니는 언니다.

어디 가냐는 형식적인 인사에 나는 묻지도 않은 내 상황을 주저리주저리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쏟아내지 못한 나의 힘든 이야기를 누구한테든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언니는 맑고 투명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내 이야기를 다 듣더니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럼 이렇게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한 푼이라도 벌어야지.

보험 회사에 와서 교육만 받아. 그럼 40만 원이 교육비로 나오니까."

실제로 언니는 나를 데려가서 회사로부터 받은 보조금을 형편이 어려운 나에게 줬다.

나를 생각하는 이타심에서 데리고 갔던 것이다.


언니의 권유를 받을 당시 내 마음은 그랬다.

보험 영업은 누군가에게 비굴하게 사정사정해서 받는 것이라고 여겼기에 보험 설계사 자체를 약간 동정하듯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필요해서 가입을 한다기보다 설계사를 도와주려고 가입을 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런 일을 한다는 가정은 꿈에서도 해본 적이 없다.

"언니, 난 보험 못해."

40만 원에 구미가 당기기는 했으나 거절했다.

"누가 보험하래? 교육만 받으라고 교육만. 애기도 데리고 와도 돼."

그 언니는 내가 평소에 믿고 따르던 정말 착하고 성실한 언니였기에 마음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사무실 근처니까 지금 가서 차나 한잔 하자. 소장님도 네가 아는 분이야. 박 00 집사님 알지?"

그러니 더 마음이 놓였다.

나를 이렇게 챙겨주고 오라 하는 곳이 내 집 말고 또 있다는 게 신기하고 고마웠다.

보험 사무실에 들렀더니 소장인 박집사님도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는 동안 나는 어느새 교육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교육 시작까지 날짜는 여유가 있었지만 내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보험회사 교육을 받겠다는 말을 들은 남편은 극대노했다.

결혼하고 이렇게 화를 낸 건 처음이다.

"너가 나가서 일하면 난 절대 한 푼도 안 갖다 줄 테니 그렇게 알아!!"

상황이 이런데 집에서 노느니 조금이라도 벌어서 가계에 보태면 고마운 거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당최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나는 남편이 생활비를 주긴 했지만 너무 턱없이 적게 줬기 때문이라며 보험회사에 나갈 이유를 애써서 만들었다.

교육이 이미 시작되었는데도 남편의 반대는 생각보다 단호했고 또 오래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출석한 날도 아깝고, 어쨌든 교육만 끝나면 될 테니 그때까지만 참고 다니자며 결심을 굳혔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자기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 이 남자에게는 자존감의 전부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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