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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걸음씩 Mar 08. 2024

황색 신호에서는 무조건!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참혹하다]

남자는 자기를 믿어 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신에 대한 신뢰를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내가 돈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맞는 것 같기도 한 것이 가끔 뉴스에 나오는 사건들 중 범행동기를 묻는 말에 '나를 무시해서'라고 답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게 그만큼 참기 힘든 일인가 보다.

물론 그들에게는 피해망상과 같은 정신질환이 있기는 하지만 여자들이 무시당했다며 범죄를 저지른 이야기를 못 들어본 것과는 대조적이다.


남편이 고액의 월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호형호제하며 지냈던 회사대표의 전적인 신뢰 때문이다.

아마도 부모에게서 결핍된 사랑이 자신을 믿어 준 대표에게서 충족되지 않았을까 싶다.

남편은 잔꾀 부리지 않고 열심을 다해 맡겨진 일을 하는 사람이니 대표에게도 그러했으리라.

결혼식 때 참석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미안해했던 대표가 우연히 시간이 허락되어 남편과 함께 우리 신혼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할 것이지  남편은 낮시간동안 내가 집에만 있는 줄 알았나 보다.

"낮에 어디 갔었어? 회사 형이 너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오늘 같이  왔었는데 아무도 없어서 한참 기다리다 그냥 갔어."

 말을 듣고 나도 미안하고 아쉬웠지만 만일 집에 있었더라도 부스스한 민낯으로 갑자기 맞닥뜨린 상황에 많이 당황했을 것 같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되어 회사대표는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남편은 장례기간 내내 장례식장에 왔다 갔다 하며 무척 많이 슬퍼했다.

'회사사장의 죽음이 저렇게 슬플 일인가?'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상실감은 부모이상이었을 것 같다.


대표의 사망으로 소속이 없어진 남편은 사업을 시작했다.

일용직 일꾼들과 팀을 짜서 공사의 미장파트만 맡아서 수주하는 식으로 일을 했는데 그 당시 분당신도시의 건설이 한창일 때라 건설경기는 매우 호황이었다.

사업을 하면서는 월급을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돈을 타서 썼는데 오히려 그 이전보다 더 풍족했다.

돈이 많아지면서 나도 비자금이라는 것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남편이 알지 못하는 돈이니 비자금이라고 해두자.


남편은 하청회사에서 재하청을 받아 일을 하고 임금을 당좌수표로 받았다.

선이자 30%를 계산하여 받았으니 그 당시 고금리를 반영한다 해도 굉장한 이자놀이였다.

남편은 친가 쪽보다  처가 쪽과 더 가까이 지낸 사람이라 무슨 일이든 나를 통해 친정도움을 많이 받았다.

당좌수표의 환전도 그중 하나다.

친정엄마를 통해 소위 돈놀이를 하는 아줌마에게 환전을 했는데 나는 그 선이자가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나의 비자금뿐 아니라 이모에게도 이 고소득 투자(?)를 권유했고 시어머니께도 알려드려 사촌 시누이까지 끌여들였다.

남편이 받은 임금뿐 아니라 다른 현장 임금도 내가 환전해 줄 테니 얼마든 가져오라고 했다.

중이 고기맛을 보면 절간에 있는 빈대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처럼 돈맛을 본 나는 판단력이 흐려져서 여러 건의 환전을 해주고 수수료의 일부를 챙겼다.


"거래처 분위기가 좀 이상해. 느낌이 안 좋은데..."

어느 날 저녁 남편이 내게 말했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마징가제트 같은 남편을 절대적으로 믿었기에 그냥 흘리는 말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 요즘 계속 당좌수표를 남발하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

"에이~ 뭐가 수상해~ 당좌수표는 부도내면 형사입건이라며?

감옥 가고 싶어 부도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겠어?"

정말 해맑은 생각이다.

아무리 세상물정을 모른다 해도 이렇게 머릿속이 꽃밭 천지일 수 있을까.


남편은 걱정하는 소리를 몇 번 했지만 나는 걱정 말라며 오히려 남편을 안심시키고 수표를 더 갖고 와도 된다고 했다.

이미 욕심이라는 놈이 내 안에 잔뜩 똬리를 틀고 있었기에 남편의 말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속도를 내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환전을 해주지도 않을뿐더러 뭔가 담보물을 받았지 그렇게 쉽게 처리하진 않았을 것이다.

몰라도 너무 몰랐던 그때는 1+1=2라는 원칙대로 세상이 돌아가는 줄로만 알고 살았다.

좋게 표현하면 아직 세상 때가 덜 묻었다고 할 수 있고 정확히 말하면 똥멍청이였던 것이다.


전세 2천만 원짜리 집에 살면서 내가 환전을 해줬던 금액은 전세 보증금의 두 배가 넘었다.

간도 크지...

아니, 오히려 그 정도에서 끝난 것을 감사해야 하는 건가?


거래처 회사 사장은 작심하고 당좌수표를 발행했다.

감옥에서 몇 년 살고 나와도 숨겨놓은 큰돈은 그대로 남아 있을 테니 할 수 있는 만큼 발행 했을테고 돈중독자와 결혼한 남편은 그 사장의 프로젝트(?)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물론 남편만 당한 것이 아니고 남편보다 훨씬 큰 금액으로 손해 본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뉴스만 제대로 보고 살았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일터인데 무지도 죄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경고를 무시한 결과는 망하는 사건의 모습으로 내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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