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보내준 돈 300만 원으로 언니와 신혼집을 구하러 다녔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물여섯에 갑자기 임신이 되었고, 그래서 급하게 결혼 날짜를 잡았고, 집계약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남편과 살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부재중인 아버지 대신 가장으로 사느라 바쁜 엄마는 결혼 준비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었다. 내가 도와 달라고 말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 언니가 아니었다면 많은 시행착오로 눈물 흘렸을 것 같다.
임신문제도 쉽게 해결해 준 언니의 도움을 받아 발품을 많이 팔지 않고도 새집을 구할 수 있었다.
보증금 300만 원에 월 15만 원의 월세를 부담하면 되는 아주 깨끗한 신축 원룸이었다.
(결혼 전 내 월급이 25만 원가량임을 감안하면 월세가 꽤 비싼 편이었다)
공사를 막 마치고 맨 위층에 주인집만 입주하여 살고 있었는데, 바로 아래층인 2층에 내가 입주할 원룸이 있었다.
말이 원룸이지 방 크기와 비슷한 거실이 있어서 남편과 둘이 살기에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주인아주머니는 신혼부부라는 말에 반색하며 좋아했다. (집주인들은 집을 깔끔하게 쓰는 신혼부부나, 독신여성을 선호한다) 집이 비어 있으니 아무 때나 이사 와도 좋겠다는 말에 신혼살림을 미리 들여놓겠노라며 계약을 했다. 부동산 중개업소를 나서는 내 기분은 큰 짐덩어리를 치워버린 것처럼 날아갈 듯 가벼웠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집상태와 계약내용을 설명해 줬다. 탠션이 하늘을 찌를듯한 내 목소리에 덩달아 좋아했다.
'네가 맘에 들면 됐어.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
남편 돈으로 집을 구했으니 이제 그 집을 채워는 것은 내 몫이다.
노는 걸 너무 좋아해서 월급을 모두 탕진하고도 모자라 대출까지 받아 쓰던 철이 없는 여자였던 나에게 모아놓은 돈이라는 것은 없다. 가전제품 마련할 돈조차 없었다. 그나마 엄마의 강요로 억지로 들었던 곗돈이 전부인데 그건 결혼 비용으로 쓰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 기억으로 100만 원 정도였던 것 같다.
내 형편을 아는 친구들이 냉장고를 선물해 주기로 하고, 자매들이 세탁기를 사주겠다고 했다. 외도 중인 아버지가 딸들 결혼에 장롱은 꼭 해주셨기에 기본적인 가구는 준비가 된 셈이다. 나도 있던 돈을 긁어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를 사서 내 방에 한가득 쌓아놨었는데 새집에 옮기고 보니 표시도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릇, 냄비를 비롯한 식기류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는데 싱크대에 넣어두면 그만인 것들이다.
나는 결혼 날짜를 며칠 앞두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처음부터 언니가 모든 준비를 도와주었으므로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결혼식 전날까지 배송이 되지 않은 가재도구들이 있었지만 신혼여행을 다녀오면 언니가 다 받아서 정리해 놓을 테니 걱정하지 않았다. 철없던 내가 언니의 고생에 보답은 했는지 기억이 없다.
결혼하던 그날은 보기 드물게 눈이 많이 내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온 세상이 들떠 있었고, 신부인 나도 뭐가 뭔지 정신이 없었지만 흥분이 됐다.
그러나 지방에서 버스를 대절해 올라온 친척들은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서른세 살의 새신랑인 남편도 기분이 많이 좋았는지 신부화장을 하고 있는 나에게 와서 떠드는 바람에 직원에게 어딜 들어오냐며 한소리 듣고 쫓겨났다.
남편은 신이 났지만 나는 축가가 너무 슬퍼서 울었다. 마치 내가 돈에 팔려가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그 축가의 곡조가 그때는 왜 그렇게 구슬프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눈물의 시작은 축가가 아니라 신부대기실에서였다. 다섯 살짜리 조카가 뭘 안다고 나를 보고 '이모, 시집가도 우리 집에 놀러 와야 돼' 하며 엉엉 울어서 나도 조카를 안아주며 꽃가마 타고 강제로 시집가는 새색시라도 된 것처럼 울었다.
예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떠나는데 시아버님이 100만 원을 주시면서 여비에 보태라고 하셨다.
나는 너무 좋아서 감사하다며 받았지만 남편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것도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축의금이 예상보다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남편 지인들의 축의금 단위는 보통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시아버님은 신혼집도 얻어주지 않았고, 축의금도 모두 챙기셨으니 그 정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라고 남편이 말했다.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시아버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많이 야속하다.
평생직장 한번 다닌 적이 없던 사람이 며느리를 보게 되니 체면이 안 서서 결혼 즈음에는 아파트 경비일을 몇 개월 했었다는 시어머니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시아버님이 너무 무시가 됐다.
그렇게 평생 집에서 놀면서 아들의 돈을 당연한 듯 받아 쓰고, 그 큰돈을 받아 쓰면서도 아들의 신혼집 하나 장만해주지 않은 이기적인 아버님이라는 이미지는 오늘날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시아버님과는 필요한 말 외에 말을 섞지 않았다. 물론 어릴 때부터 천식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활동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가정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가장은 이해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다.
아들이 결혼한 후로 매달 들어오던 돈줄이 끊어지니 시아버님은 멘붕이 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생활비를 달라고 하기에는 당신이 너무 젊은 50대 중반이었으니 자존심도 상했을 것 같다.
내가 알아서 드렸더라면 좋았겠지만 나는 시댁이고 친정이고 생활비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모지렁이였다. 시아버님과 동갑인 친정엄마는 그때도 열심히 일을 하셨기에 50대의 나이는 일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다.
결혼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까. 시아버님이 전화를 하셨다.
아무개가 결혼을 하니 축의금을 해야 한다며 돈을 보내라고 하셨다.
"네~ 보내드릴게요"
"그분들 다 니들 결혼 때 왔던 분이니까 니들이 부조해야 한다!"
결혼식 부조금은 당신이 다 챙기셨으면서 갚는 건 우리가 갚아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에도 새신부인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시아버님의 요구에 두말없이 순종했는데, 느닷없이 화난 말투로 의무감을 심어주며 화를 내는 아버님 의아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생활비를 못 받는 것에 대한 서운함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내가 그때 눈치를 못 챈 것이 천만다행이다. 알았더라면 사는 내내 시아버님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돈을 드리면서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남편과 많이 다투었을 테지.
내가 시아버님에 대해 붙인 별명이 있다.
사해
이스라엘에 있는 죽음의 바다로 바닷물이 들어가기만 하고 나가는 물길 없이 증발하기 때문에 염도가 보통 바닷물의 다섯 배가 넘어서 생물이 살 수 없는 바다다.
시아버님은 우리에게 돈을 받기만 하셨지 한 번도 손주들에게 용돈은 고사하고 세뱃돈도 준 적이 없다.
돌아가시고 나니 이부자리 밑에 모아둔 현금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동서에게 들었다. 시할머니에게 병약한 아들이라며 항상 보호만 받고 자랐다고 했는데 과잉보호가 낳은 이기심이 아닌가 싶다.
한 번은 그런 시아버님이 너무 야속해서 '아버님 치킨 좀 사주세요.'라고 말을 해서 억지로 치킨을 배달시켜 먹은 적이 있다. 바로 전에 수표로 돈을 드렸기 때문에 돈이 없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에 치킨을 사달라고 한 며느리가 얄미웠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축의금을 요구할 때처럼 시아버님은 가끔 권위적으로 며느리들에게 잔소리를 할 때가 있었는데 함께 사는 동서는 시아버님을 어려워했다지만 나는 인생을 알아가면서 시아버님에 대해 무시하는 마음이 생겼다.
앞에서는 시아버님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앉아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돈을 벌지 못하면 그냥 잉여인간일 뿐이라는 돼먹지 못한 돈철학이 있었다.
남편은 그 후에도 시아버님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다만 자랄 때 자주 때려서 밖에서 놀다가 시아버님이 잠들고 난 다음에 집에 들어갔다는 말은 한 적이 있다. 그때 남편은 나중에 절대 자식에게 매질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는데 지키기 힘든 그 결심을 남편은 한 번도 깨지 않았다. 아무리 결심해도 학습되어 몸에 밴 습관, 특히 폭력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는데 기적에 가까운 일이 남편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