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디로 1년을 보낸 남편은 결혼 후 한 달을 쉬었다. 일부러 휴가를 냈다고 했지만 그의 직업(미장)이 겨울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전임신 3개월 만에 결혼을 했는데 공교롭게 남편에게는 가장 한가한 때를 선택한 셈이니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가 벌써 효도를 했다고나 할까.
쉬는 한 달 동안 거의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가끔씩 연애 때 다니던 단골 포장마차에 가서 내가 잘 먹던 곰장어 한 접시 먹고 오는 것 외에는 공식적인 외출만 했다. 남편은 처음 내가 곰장어를 먹는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매력을 느꼈다고도 했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내 모습은 요즘말로 차도녀 같았다고 했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화났냐'는 말을 가끔 들을 정도로 나도 모르게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생머리에 화난 듯 굳은 얼굴, 깡마른 몸이 남편에게 상당히 까칠한 여자처럼 보였나 보다. 데이트를 하던 어느 날, 우연히 지나는 길에 보인 포장마차에 들어갔는데 남편이 곰장어를 주문했고, 난생처음 먹어본 곰장어는 식감이나 맛이 환상적이었다. 26년 살아오면서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이었는데 정체가 뭔지 알 수 없었으나 한입 먹고 다음 것을 집는 동안 입에 침이 고일정도로 맛있었다. 레스토랑 음식이나 먹을 줄 아는 여자로만 생각했을 텐데 곰장어에 눈을 뜬 나는 닭똥집, 참새구이등 혐오식품이라고 하는 음식들이 신기하고 맛이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잘 먹어서 예쁘다며 만나기만 하면 포장마차에 데리고 가서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주문하라고 했다. 내가 못 먹는 음식이라고는 '없어서 못 먹는 것'과 '안 줘서 못 먹는 것'밖에 없을 정도로 가리는 것이 없는데 남편은 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결혼하고 남편과 함께 매일 집에 있다 보니 외출하기 위해 씻고 화장하는 것이 귀찮았고, 그렇다고 맨얼굴로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입덧은 따로 없었으나 가끔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날 때가 있었는데 남편에게는 너무 먹고 싶어서 정신을 못 차릴 것처럼 엄살을 부렸고 그럴 때마다 남편은 어떻게든 찾아서 사다 주려고 했다.
이래서 어른들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한 건가 싶었다.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있어도 놀고먹다 보면 하루는 정말 빨리 지나갔다.
TV연결도 아직 되지 않았고, 신청한 전화도 아직 개설되지 않아서 집은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였으나 불편하고 아쉬운 게 없었다. 가끔 1층에 있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재미있는 비디오를 빌려다 보는 것이 유일한 문화생활이었다.
본의 아니게 은둔생활을 즐기고 있던 어느 날, 느닷없이 시어머님이 오신 적이 있었는데 어찌나 당황스러웠던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잠시 기다리라며 문밖에 세워두고 이불을 개고 옷을 챙겨 입느라 분주했는데 그때 어머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전화도 없는 아들내외가 궁금하여 몇 번을 망설이다 오셨을 텐데 아마 괜히 온 게 아닌가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쉬는 한 달간 여러 번의 집들이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직장,
친정 식구들,
시댁 식구들,
내 친구들과 남편친구들.
집들이 전 남편은 나에게 따로 돈을 주면서 필요한 가전제품을 사다가 채워 놓으라고 했다. 남편이 보기에도 너무 허전하고 허접했던 모양이다. '사람들한테 너 기죽으면 안 되잖아'라고 말하면서 행여나 내가 자존심에 생채기라고 날까 하여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나는 이미 남편이 주는 돈에 대해서는 자존심 따위 떠나보낸 지 오래였다.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라 여기며 덥석 받아 들고 신나는 쇼핑을 시작했다.
정말 나는 결혼 잘했다.
세상 어떤 남자가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배려해 줄까.
남편이 준 돈으로 비디오와 식탁, 전자레인지등 필요한 가전과 가구를 샀다.
그때도 남편은 어떤 가전제품을 사는지, 얼마짜리를 사고 얼마를 썼는지 전혀 묻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돈을 주면서 '너한테 주는 돈은 저금을 하는 느낌이 들어'라고 말을 했으나 결국 그 돈들은 밑 빠진 독에 부어진 탓에 모두 흘러 나가 버렸다.
그때 돈을 잘 모으고 재테크를 할 줄 아는 지혜가 있었더라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되돌리고 싶은 삶의 안타까운 순간이 몇 번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때다.
처음 살던 신혼집에서 딸을 낳았다. 아기가 생기고 나니 짐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필요하다고 요구만 하면 조폐공사처럼 어디선가 돈을 갖다 주는 남편덕에 유아용품도 이것저것 부지런히 사 모았다.
그 쪼끄만 애기 짐이 우리 두 사람의 짐보다 더 많아져서 휑하던 원룸은 물론 거실까지 빽빽해졌다.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역시 남편은 두말하지 않고 방이 두 개인 큰 빌라를 미리 전세로 계약해서 이사 들어가기 며칠 전 나에게 서프라이즈 했다.
현재 사는 곳보다 교통도 훨씬 좋고 인프라가 잘 갖춰진 위치에 있는 신축빌라였다. 그중에 평수도 가장 넓고 층수도 딱 좋은 2층 같은 3층이었다.
한마디로 남편은 내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다 들어주는 초능력자였다.
오래돼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때가 아마 남편이 사업을 시작했을 때인 것 같다.
미장이라는 기술도 있었고 그동안 일하며 배운 노하우로 인부를 구해 작은 공사를 맡아서 했다.
사무실이 따로 없었기에 필요한 일은 집에서 모두 이루어졌고, 자연스럽게 나는 남편이 하는 일의 경리일을 봐주었다.
일용직 근로자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날엔 집이 정신이 없었다.
돈을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계산해서 지급하고 정산이 끝나면 남편은 일꾼들을 데리고 근처 고깃집에서 술을 마셨다.
어린 딸이 있으니 집에서 사람을 맞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데다가 새댁인 내가 그다지 음식솜씨가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노임을 계산하고 남는 돈은 자연스럽게 내 주머니로 들어갔고, 남편은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다.
그렇게 모아지는 돈은 생각보다 빨리 불어나서 그때부터는 돈 모으는 재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불길한 조짐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세상 모든 일들은 돈이면 다 될 것 같았다.
딸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또 임신을 했다.
산후어혈로 약을 먹는 바람에 모유 수유를 하지 않았더니 바로 다음 달에 생리를 했고, 쉽게 임신이 된 것 같다.
잠만 자면 임신을 하냐며 남편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번엔 아들 낳아야지?' 했다.
친정이 딸부잣집인데 언니가 시집을 가서 딸 둘을 낳고 나도 첫딸을 낳았을 때 엄마는 병원에 와서 그랬다.
'내가 혹시나 해서 니 형부한테 자네 친정엄마 닮아서 자꾸 딸 낳는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하고 말했더니 니 형부는 그러더라. 그렇게 닮는 게 실제로 맞는 거 같다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열등감에 쓸 만한 것들은 다 가져오는 열등감 덩어리 엄마에게 형부의 그 말은 적지 않게 상처가 된 모양이다.
지금 막 손녀를 낳은 딸을 찾아와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아들을 기다리는 남편, 손녀가 아닌 손자를 애타게 기다리는 엄마.
임신은 했지만 아들에 대한 부담감이 양 어깨를 비롯해 온몸을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남편은 빨간 고추 모양 장식품을 차에 달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릴 들었다며 대롱대롱 매달고 다녔다.
남편차를 탈 때마다 그 장식품을 보며 세뇌도 된 것 같고, 가스라이팅도 되는 것 같았다.
'하나님. 아들만 주시면 정말 오후예배까지 빠지지 않고 잘 드릴게요.'
발등의 불은 뭐니 뭐니 해도 기도지. 약삭빠른 서원기도를 했다.
헌금드린다는 말은 못 하겠다는 인색한 마음으로 제일 지키기 쉬운 것으로 딜을 했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그런 내 기도도 하나님은 외면치 않으시고 이듬해 귀한 아들을 주셨다.
남편은 그날 너무 좋아서 병원 간호사에게 금일봉을 주고, 친정엄마는 분만실 앞에서 손뼉 치며 환호성까지 질렀다고 한다.
덕분에 병원에서는 간호사들의 특별한 배려로 아주 편한 입원생활을 했다. 모유수유도 내가 힘들다고 하면 바로 아기를 데려갔고, 언제든 보고 싶다고 하면 데려다주었다. 그때가 내 행복의 최고점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는 법.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지.
꽃길만 걷는 인생은 없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의 상징처럼 여겨진 아들이 태어나면서 조금씩 어둡게 다가오는 그림자는 보지 않으려 눈을 감은 나를 정조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