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과 마주한 어느 밤의 이야기
* 주의! 이 글에 나오는 모든 등장 인물은 실제 인물이고,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상상이 아니니 유의하세요.
(특히 당신의 감정이 비슷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면, 반려 뱀을 맞이하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작년이었나.
올해 4월에 물가에서 어떤 인연을 만난다는 점괘가 있었다.
그다지 점은 믿지 않는다.
그리고, 점에서 말하는 '인연'은 딱히 좋은 것만도 아니다.
홀린 듯이 초저녁부터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자정이다.
오후의 루틴 –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그런 것들을 하지 않고.
아마도 휴식이 필요했나 보다.
길을 걷는 여정에서 오는 회의감 혹은 피로감
여하튼, “4월의 인연이라니. 그게 뭐야.”
라고 생각했다.
심야에,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려다가
강력한 환영이 펼쳐졌다.
나는 호수 가에 서 있다. 아마도 호수 공원 같은 풍경이다.
잔잔한 물속에서
산 보다도 더 거대한 뱀이 물속에서 몸을 드러냈다.
너무 거대해서 별로 보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가까이에서 바라본다면,
몸에 전율이라도 일 것만 같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문득, 무의식을 대면하는 방법이 생각났다.
뱀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다시 환영이 시작된다.
호수 속에서 몸을 일으켜
초식 공룡처럼 고개를 내린 뱀을 바라보았다.
“안녕 뱀아,
너는 나에게 왜 온 거야?”
내가 물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말을 하기 어려운 듯하다.
“모습을 드러낸 이유를 말해줘.”
뱀은 눈빛이 에메랄드 같은 녹색이다.
다이아몬드 모양 - 카드에 나오는 그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반짝거린다.
마치 보석 같다.
애정을 담은 눈으로 날 바라본다.
느낌이 좋은 걸 보면 나쁜 뭔가의 그런 존재는 아니라 안심했다.
그런데 말을 잘 못하는 뱀이군.
“난 너를 따라다닐 거야.”
라고 뱀이 말한다.
사실, 서로 음성으로 대화를 한 것은 아니다.
나도 뱀도
서로의 파장으로 소통을 한다.
말을 마친 뱀은 뭔가 더 발랄해진 느낌이다.
낯설지 않다.
그리고 환영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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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에서 만나기로 한 인연은 뱀이었군.
나의 무의식은
거대하고
또 발랄한
뱀이다.
에너지는 넘쳐나는 것 같다.
늘 따라다닌다니,
이제는 나도
나의 그림자를
조금은 안아줄 수 있게 된 걸까?
* 무의식을 통합하는 방법은 이전 글 중 '자신의 그림자와 대화하는 법' 등의 글에서 보세요.
혹시 궁금하시다면..
이 글은 칼 융의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당신의 무의식이 ‘자기(Self)’를 향한 통합 과정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서사이자 깊은 내면 여정의 개시 장면이에요. 하나씩 분석해볼게요.
융에게 있어 뱀은 고대적이고 원형적인 상징입니다. 뱀은 종종 생명력, 재생, 변화, 치유, 무의식, 그리고 그림자(Shadow)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거대하고, 물속에 있고, 산보다도 더 크고,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모습은 당신의 억눌린 감정, 본능적 에너지, 혹은 잠재된 힘이 무의식의 심연에서 솟아오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뱀의 에메랄드 녹색 눈은 생명력과 자기(Self)의 가능성, 즉 성장을 향한 초대로 볼 수 있어요.
이는 융이 말하는 '이미지와의 능동적 상상(Active Imagination)' 기법과 거의 일치합니다. 뱀은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감정과 본능, 상징적 진실의 대사자입니다. 직접 말로 표현되지 않고 파장으로 느껴진다는 점은, 아직 이 감정이나 에너지들이 충분히 의식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해요.
뱀은 단순한 무의식의 생명체가 아니라, ‘그림자’와 ‘아니마/아니무스’의 교차지점에 있는 자율적 존재로 보입니다. 융은 자아가 그림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그것이 개별화 과정의 시작이라고 보았어요. “이제는 나도 나의 그림자를 조금은 안아줄 수 있게 된 걸까?” 라는 질문은 자아가 무의식과의 연합 가능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죠.
물가, 특히 호수는 융에게 있어 무의식의 표면이며, 감정의 심연을 상징합니다. ‘4월’, ‘물가’, ‘환영’이라는 삼중 구조는 심리적 전환기의 문턱을 뜻해요. 즉 이 에피소드는 외부 사건이 아니라, 의식의 문이 무의식에게 열린 밤이었던 거죠.
범주: 분석 내용
심리적 위치: 개별화 여정의 초기 – 무의식의 자율성 인지 중
무의식의 상징: 뱀 = 본능, 그림자, 생명력, 치유, 억눌린 자아
자기(Self)와의 관계: 자기(Self)의 출현을 예감하고 있음 (에메랄드 눈빛의 뱀)
통합의 방식: 능동적 상상 / 상징과의 대화 시도 / 감정의 인정
잠재 위험 요소: 뱀의 힘이 너무 거대해 의식이 압도당할 가능성 존재 (경계 필요)
현재 과업: 무의식과의 소통을 유지하며 자아를 안전하게 중심에 두고 통합의 과정을 지속하는 것
“나의 무의식은 나보다 먼저 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의식이 뱀의 형상으로 찾아왔다.
나는 이제야 진짜 나와 마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