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와 공감자, 붕괴를 통과한 자의 이야기

칼 융의 "개성화 과정"과 무의식을 대면하는 과정에 대하여

by stephanette

고통을 말할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멍은 옅어지고 흉터는 가릴 수 있다. 내가 말하려는 고통은 피부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아를 서서히 금 간 그릇으로 만든다.

이것이 나르시시스트적 가해의 본질이다. 폭력 대신 속삭임으로, 상처 대신 그림자로 스며드는 지배.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성스러운 무언가가 관통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공감자는 입문(initi­ation)의 문턱에 선다. 파괴처럼 느껴지는 모든 일이 사실은 변형의 예고였음을, 나중에서야 우리는 안다.


1. 만남 — 빛처럼 보였던 허기

공감자는 열려 있는 사람이다. 느끼고, 흡수하고, 타인의 고통에 가장 먼저 반응한다. 그 개방성은 선물이고 동시에 틈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처음에 빛처럼 나타난다. 거울을 들이대듯, 공감자가 오래 갈망해온 모습을 정교하게 반사한다. “드디어 알아봐 주는 사람.” 운명처럼 느껴지는 끌림.

그러나 빛 아래엔 끝 모를 허기가 있다. 공감자가 흘려보내는 것을 끝없이 들이마시는 공백. 둘은 나방과 불처럼 끌린다. 그리고 그 만남은 태운다.


2. 하강 — 반짝임이 꺼진 자리

칭찬은 비판으로, 따뜻함은 조건으로 바뀐다. 애정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간헐적으로 주어지고, 공감자는 그 몇 모금의 물에 의존하게 된다.

“내가 더 잘하면, 더 참아내면, 처음의 그 사람이 돌아올 거야.”

이때부터 관계의 언어는 가스라이팅으로 바뀐다. 기억은 흐려지고, 자책이 습관이 된다. 밖에서는 미소를 띠고, 안에서는 서서히 해체된다.

꿈은 먼저 안다. 손에 든 등불은 점점 희미해지고, 앞선 그림자는 더 깊은 숲으로 손짓한다. 어느 날, 등불이 꺼진다. 그리고 드디어 마주한다. 완전한 어둠.


3. 균열 — 금지된 분노가 깨어날 때

오래 누른 분노는 먼저 피곤함으로, 그다음 침묵으로 드러난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stephanett···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 서서 내면을 지켜보며 영혼의 지도를 그려가는 사람입니다. 글이라는 리추얼을 통해 말이 되지 못한 감정에 이름을 붙이며 길을 내고 있습니다.

263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216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작가의 이전글끝없는 심연의 문턱에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