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융의 "개성화 과정"과 무의식을 대면하는 과정에 대하여
고통을 말할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멍은 옅어지고 흉터는 가릴 수 있다. 내가 말하려는 고통은 피부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아를 서서히 금 간 그릇으로 만든다.
이것이 나르시시스트적 가해의 본질이다. 폭력 대신 속삭임으로, 상처 대신 그림자로 스며드는 지배.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성스러운 무언가가 관통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공감자는 입문(initiation)의 문턱에 선다. 파괴처럼 느껴지는 모든 일이 사실은 변형의 예고였음을, 나중에서야 우리는 안다.
1. 만남 — 빛처럼 보였던 허기
공감자는 열려 있는 사람이다. 느끼고, 흡수하고, 타인의 고통에 가장 먼저 반응한다. 그 개방성은 선물이고 동시에 틈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처음에 빛처럼 나타난다. 거울을 들이대듯, 공감자가 오래 갈망해온 모습을 정교하게 반사한다. “드디어 알아봐 주는 사람.” 운명처럼 느껴지는 끌림.
그러나 빛 아래엔 끝 모를 허기가 있다. 공감자가 흘려보내는 것을 끝없이 들이마시는 공백. 둘은 나방과 불처럼 끌린다. 그리고 그 만남은 태운다.
2. 하강 — 반짝임이 꺼진 자리
칭찬은 비판으로, 따뜻함은 조건으로 바뀐다. 애정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간헐적으로 주어지고, 공감자는 그 몇 모금의 물에 의존하게 된다.
“내가 더 잘하면, 더 참아내면, 처음의 그 사람이 돌아올 거야.”
이때부터 관계의 언어는 가스라이팅으로 바뀐다. 기억은 흐려지고, 자책이 습관이 된다. 밖에서는 미소를 띠고, 안에서는 서서히 해체된다.
꿈은 먼저 안다. 손에 든 등불은 점점 희미해지고, 앞선 그림자는 더 깊은 숲으로 손짓한다. 어느 날, 등불이 꺼진다. 그리고 드디어 마주한다. 완전한 어둠.
3. 균열 — 금지된 분노가 깨어날 때
오래 누른 분노는 먼저 피곤함으로, 그다음 침묵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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