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지향성의 일상화, 하이데거
*사진 Unsplash
왜 평온한 사람들은 어두운 예술을 만드는가?
아주 오래 전 예능 콘텐츠로 북유럽 남자들의 일상적 취미인 버섯 캐기에 대해 본 적이 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삶을 누릴 것만 같은 북유럽 사람들은 숲에서 평화롭게 버섯을 줍는 취미를 갖고, 스칸디나비아 범죄소설 - 노르딕 누아르나 데스 메탈 같은 어둡고 잔혹한 창작물들을 만들어낸다.
자연과의 교감, 죽음의 인식
버섯 채취는 자연과의 교감이다. 당연히 자연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그러니, 그들의 독버섯과 식용 버섯을 구분하는 작업은 죽음과 생존의 경계를 다루는 일이기도 하다. 무심히 걷는 숲길에서 이들은 죽음을 관찰한다. 그러니 버섯 캐기는 은밀히 죽음을 마주하는 훈련이다.
평온한 현실과 어두운 상상의 균형
북유럽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사회 중 하나다. 낮은 범죄율, 잘 갖춰진 복지. 역설적으로 현실이 지나치게 평온할 수록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부재하는 위험을 갈망한다. 위험과 갈등은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장치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설 속에서 잔혹한 살인을 보고, 메탈 음악에서 분노와 죽음을 울부짖으며 상상 속 위험을 체험한다. 현실이 안전할 수록 상상은 더 어두워진다. 사회가 허락한 방식으로 죽음 충동 - 타나토스를 풀어내는 방식이다.
집단적 무의식과 북유럽의 어둠
그 곳의 자연은 극단적이다. 긴 겨울, 태양이 지지 않는 여름, 끝없는 어둠의 계절. 그 공간에서 사는 이들은 심리적 무의식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어두운 숲, 눈 덮인 대지, 고요한 호수를 배경으로 그들의 범죄 소설은 인간 내면의 어둠을 투사한다. 그들의 문화는 그림자를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평화로운 일상은 페르소나이고, 그들의 문화는 집단적 그림자의 목소리다.
윤리와 미학의 역설
그들이 즐기는 범죄소설이나 메탈음악은 도덕적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 질서를 되새기는 방식이다. 소설 속 잔혹한 살인은 정의와 질서를 갈망하게 만들고, 데스 메탈은 혼돈을 노래하면서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공동체적 카타르시스를 준다. 안정된 사회일수록 예술은 불안정과 혼돈을 실험한다.
왜 평온한 사람들은 어두운 예술을 만드는가?
그들은 죽음을 숨기지 않고 일상에 통합시킴으로써, 오히려 삶을 더 단단히 붙잡는다.
버섯을 줍는 손길과 메탈의 포효는 사실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죽음을 직면하는 삶, 그 위에서 비로소 평온은 완성된다.
하이데거의 죽음-지향(Sein-zum-Tode)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거기-있음, 현존재이다. 자기 존재를 이해하고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러나 이 존재는 본질적으로 죽음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이다. 언제나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규정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불렀다.
그가 말하는 죽음은 생물학적 삶의 끝이 아니다. 죽음은 나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다.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반드시 나 자신이 맞닥뜨려야 하는 것. 죽음은 회피할 수 없는 최종적 가능성으로 다른 모든 가능성을 무화(無化)시켜 버린다. 죽음은 실존을 가장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죽음을 의식할 때 인간은 자기 실존을 더 진지하게 살 수 있다. 육체적 아픔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고나서야 건강하게 돌아다니던 일상을 그리워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평소에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 속에서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산다. 죽음을 외면하고 일상에 안주한다. 그러나 죽음을 진지하게 직면하고 나면, 언젠가 나는 죽는다는 인식으로 인해 자신을 현재의 삶으로 불러들인다. 이를 통해 자기 고유의 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하는 진정한 삶으로 전환할 수 있다. 죽음의 지향성은 삶을 더 자기답게 살도록 이끄는 힘이다.
죽음을 직면할 때 인간은 끝남이 아니라 자기 삶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발견한다.
죽음은 언제든 올 수 있기게, 우리는 늘 죽음을 향해 살고 있다.
죽음을 성실히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가장 충실히 사는 방식이다. - 하이데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