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수많은 별 중 하나로 오래 빛날 단 한 번 뿐인 찰나
*사진: Unsplash
둘째가 에버랜드에 놀러 간다고 신이 나 있다.
하루 전부터 뭔가 준비를 하느라 부산스럽다.
“엄마, 버스가 없어.”
“잉? 왜 없어. 거긴 직항버스가 있는데.”
“없던데.”
“검색해 보면 되지. 찾아볼게. 흠, 한 번 만에 나오는데.
여기서 타면 되겠네. 오전 9시에 출발해서 거기선 6시 반에 출발. 왕복이네.
지하철 타고 가서 버스 타면 두 시간 가까이 걸리겠네.”
“엄마, 링크 보내줘.”
“그런데 네가 가는데, 엄마가 브리핑하는 거야? 네가 찾아봐야지.”
“엄마, 없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방법을 물어봐야지.
결과까지 엄마가 찾아서 브리핑하는 건 아니지.
네가 어떻게 가고 뭘 준비할지 정해서 엄마한테 브리핑을 해야지.
네가 일정과 준비물을 말해줘야 엄마가 보내줄지 결정을 하는 거니까.”
둘째가 대답이 없다.
고개를 들어보니, 울먹이고 있다.
“아니 왜, 우는 거야?”
“내가 찾아보려고 했어. 그런데 없었단 말이야. 내가 브리핑할게.”
“그래. 하아... 엄마는 지금 시체놀이 한 시간 해야 해. 너무 피곤해.
퇴근하고 두 시간 만에 이제 겨우 앉았어.”
안방에서 시체놀이 중인데, 카톡이 울린다.
“카톡.”
“카톡.”
“카톡.”
ㅋㅋㅋㅋ 그렇게 신이 난 건가.
“엄마는 시체놀이 중이야. 한 시간 뒤에 이야기하자.”
“엄마! 엄마? 시간 됐어.”
“엄마?? 엄마!!”
그래서 껌딱지라고 하나 보다.
어딜 가든 옆에 찰싹 달라붙어 팔짱을 끼고 걷는다.
몸만 컸지 완전히 애기 모드다.
하긴, 어릴 적부터 껌딱지였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고,
곁에 꼭 붙어 있고 싶어 한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둘째는 지난번, 편도 세 시간이 넘는 곳에서 부스 전시회를 했던 날을
“레드 데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고생했다.
손도, 발도 다치고 빨갛게 부어올랐다.
정작 보여주려던 건 빨간 가발을 챙기지 못해서
트렁크에 넣어둔 빨강 코트와 빨강 우산도 하나도 보여주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그걸 만회라도 하듯 옷을 준비한다.
집에 있는 온갖 검은 옷이 거실 한가운데 흩어져 있다.
나는 안락의자에 앉아 아이의 패션쇼를 구경한다.
그러다 내 옷도 하나, 둘 꺼내진다.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정장 재킷.
정가 200만 원짜리,
백화점 세일에서 1만 원에 샀던 그 옷이다.
어깨가 위로 솟은 과감한 스타일이라
소비자들에게 외면받았던 덕분에
나는 좋은 옷을 좋은 가격에 얻을 수 있었다.
“엄마, 이 옷은 뭐야?”
“응, 출근복.”
“뭐? 이걸 입고?”
“응, 학생들이 좋아해.”
“헐, 설마. 엄마가 이걸 입은 건 한 번도 못 봤는데.”
“무슨 소리야. 가을 내내 입었는데.
그거 이탈리아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그런 게 왜 있어??!”
“ㅋㅋㅋㅋ 무려 200만 원짜리야. 조심히 입어야 해.”
“헉! 이게?”
“응, 그런데 만 원에 샀어. 어깨 뽕이 과해서 아무도 안 샀나 봐.”
그렇게 옷을 수선해 주며 다시 보니 참 오래 입었다.
블랙 실크 장식이 반짝이는, 연미복 같은 옷이다.
전체는 무광 블랙 소재로 고급스럽지만
이제 여기저기 낡은 흔적들이 있다.
그 옷을 입고 돈을 벌러 다니면서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일 입고, 매일 일하던 옷.
그 매일이 쌓여 이 옷은 이렇게 낡아버렸다.
문득, 그 성실한 날들이 떠올랐다.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대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낡은 옷처럼
나도 참 노곤했겠구나 싶었다.
“좋은 옷을 빌려줬으니 불편하진 않을 거야.
그 대신, 깨끗하게 잘 입어야 해.”
아이는 코트를 꺼내 입어본다.
어깨에 툭 걸치더니 말한다.
“이게 좋겠다. 옆 단추를 풀면 망토처럼 돼.”
“와, 이게 옆에 단추가 있었어? 몰랐네.”
“ㅎㅎ 좋아? 멋지네. 나와서 포즈 잡아봐. 사진 찍어줄게.”
“잠깐만, 엄마. 내가 마술 보여줄게.”
핼러윈이라며 피의 얼룩을 직접 하나하나 그려 넣은 카드를 꺼낸다.
카드 마술을 한다.
뒤집지도 않았는데 뽑는 족족 다 맞춘다.
나는 모르는 척 놀라워한다.
“이야~ 어떻게 맞춘 거야? 와우!”
“쩔지?”
“그러게.”
“완전 쩔지?”
“그래 그래, ㅎㅎ.”
그렇게 웃으며 아이는 카드를 정리해서 박스에 정성스레 넣는다.
내일 만날 친구들과 사람들에게 보여줄 생각에
입가에는 연신 미소가 번진다.
그 표정이, 이 밤의 가장 반짝이는 불빛 같다.
작은 패션쇼와 마술 공연이
어쩌면 아이의 세상에서는 가장 중요한 무대라는 걸.
나는 피곤해서 시체놀이를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아이는 나의 피로를 공연으로 위로해주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오늘도
낡은 재킷처럼
하루를 걸쳤다 벗어놓는다.
어쩌면, 에버랜드나 코스프레는 다 핑계일지도 모른다.
그저 엄마와 함께 다정한 시간을 보내려는 작은 핑계
나는 이 순간이 절절히 감사하고, 또 행복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단 한 번뿐인 찰나이니까.
이 순간은 내 삶을 밝히는
수많은 별 중의 하나로 오래도록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