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고백 - 피의 혈맹

나에게는 혈맹이 있다.

by stephanette

*사진: Unsplash


나에게는 혈맹이 있다.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피의 맹세를 한 이들이다.


혈맹의 조건

1. 장례식 참석

2. 연락은 언제든지 가능

3. 도움을 청하면 뭐든 다 도와줌


하긴, 이건 조건이라기보다는 그저 암묵적인 룰일 뿐이다.


연락이야 언제든지 가능하다.

새벽 3시에 만취해서 전화가 와도 상관없다.

도움을 청하면 다 해준다.

그러나 혈맹은 각자 알아서 잘 살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급한 연락도

잦은 소통도

엄청난 도움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뭔가 요청해서 도와주면

그걸 다 갚는다.

은혜 갚는 까치 뭐 그런 이미지인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그런 말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런 모습들을

다 공유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딱히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내 시신을 수습해 줄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 혼자서 살 때에는

세 명의 친한 이들에게 내 연락처를 공유했다.

내가 갑자기 급사를 하면,

키우던 고양이들이 배가 고파서

나를 뜯어먹을 수도 있으니.

가끔 내가 연락이 안 되면,

전화라도 하라고 만든 비상연락망이다.

한 번도 써본 적은 없다. 다행히도.


그리고,

이제 현생을 살면서

나는 나의 혈맹에게 기대어서 살아간다.

어떤 일이 생겨도 끄떡없는 그런 존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 줄 거라고 알고 있다.

나는

밤중에 갑자기 시체를 메고 오더라도

다 수습해 줄 생각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들이 그랬기 때문이다.


멋진 일이다.

혈맹이 있다는 것은.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멋진 혈맹들이

일 년에 한 번 송년회도 제대로 못한다.

다들 바빠서


각자 잘 살면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혈맹을 더 늘려가려는 생각도 없다.

도화나무도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까.


연말이 되니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피의 맹세를 하던 이들이 갑자기 보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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