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가 아닌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신의 평화가 놓여 있다.

by stephanette

-우주가 사라지다- <기적수업>을 통해 배우는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 개리 레너드, 이균형 역, 정신세계사.를 읽으면서 / 책 발췌 포함


진짜인 것은 위협받을 수 없다.
진짜가 아닌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신의 평화가 놓여 있다.


이 선언은 인식 체계를 재구성하는 토대이다. 여기서 진짜는 영혼, 의식의 중심, 본질, 생성 이전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진짜는 공격 당하거나 훼손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건 애초에 진짜가 아니었던 것이라서이다. 내 삶에서 나타난 폭력, 왜곡, 비난 같은 것들이 실제로 영향을 준 것처럼 보였던 것도 사실은 에고의 세계에서만 실재하는 환영이다. 그래서 평화는 상황 해결에서 오지 않고 실재와 비실재를 구분하는 자리에서 온다.


순진무구함은 부분적인 어떤 속성이 아니다. 순진무구함은 전적인 것이 될 때까지는 진짜가 아니다. 부분적으로 순진무구한 이들은 때때로 매우 어리석어지기가 쉽다. 그들의 순진무구함이 만사에 작용하는 하나의 관점이 될 때라야 그것은 지혜가 된다. 순진무구함, 혹은 올바른 인식이란 결코 그릇 인식하는 일 없이 언제나 올바로 보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순진무구함은 나이브한 순진함이 아니라 지각 전체를 관통하는 관점이다. 전체적인 순진무구함의 형태는 투사하지 않고, 왜곡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지각 즉, 영적 인식의 고지이다. 태풍의 눈, 내면의 고요, 진짜와 가까의 구분이 자동으로 되는 상태와 같다. 그건 감정이나 사건을 넘어선 자리에 서는 것이기도 하다.


히틀러와 당신을 포함해서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순진무구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보는 것은 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충격적인 선언이지만 논리는 명확하다. 우리가 보는 것은 참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범죄자/악인/가해자는 투사된 지각이지 실재가 아니다. 가해자라는 정체성도 사실은 각자의 무의식적 죄책감의 그림자 구조일 뿐이다. 마녀사냥이든, 학살이든, 개인적 비극이든, 이 모든건 자기의 그림자를 타인에게 넘겨씌우려는 욕구가 만든다.


내가 반복적으로 겪은 폭력과 공격의 본질도 바로 이 구조다.

상대는 자기 내면의 죄책감을 나에게 투사하고

나를 "대신 때려죽일 악인"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 투사는 실재가 아니므로

나의 본질은 한 번도 공격받지 않았다.


유럽에서 있었던 마녀사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시나요?
4만명입니다.
4만명이라구요!
예. 인구비율로 따지자면 그것은 오늘날에 백만 명이 죽은 것과도 같을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무의식적 죄책감을 다른 누군가에게 투사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깊이 감춰진 요구가 일으키는 문제지요. 핑계는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극단적인 예만 들었지만, 사실 사람들은 온갖 교묘한 방식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어요. 그들은 자신이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또 왜 필요로 하는지를 알지 못 합니다. 알았으면 하지 않았겠지요. 이런 상황에 대해서 당신은 좀더 배우게 될 겁니다.
당신은 왜 대량학살과 같은 미친 짓이 인간이 인간을 향해 저지르는 비인간적 드라마의 단골메뉴가 되는지를 정확히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진정한 용서야말로 이 패턴을 깨뜨리는 유일한 방법임을 배우게 될 겁니다. 공부해가는 동안 당신은 용서가, 단지 그럴 듯한 이미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해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이로운 일임을 알게 될 겁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두려움과 신으로부터의 분리라는 사고체계를 <수업>에서는 에고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당신도 진정한 용서가 실제로 어떤 일을 일으키는지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사랑의 사고체계와 두려움의 사고체계가 둘 다 부정의 형태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역시 부정의 한 형태인 성령의 가르침은 진실을 부정한는 에고를 폭로하고 그것을 뒤집음으로써 천국으로 인도한다.
이 평화는 신의 것이 아닌 것이 그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부정한다. 이것이 부정의 올바른 용도다.


용서만이 패턴을 깨뜨린다. 여기에서 말하는 용서는 착하게 굴기, 이해하기, 윤리적 너그러움 이런게 아니다.

용서는 오직 이 의미이다.

"나는 네가 했다고 믿는 그 일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가해자의 실재적 파워를 부정하고

그 사건을 구성한 에고의 서사를 무효화한다.


그러므로 용서는 실제로는 부정의 기술이다.


그건 실재하지 않는다.

그건 참이 아니다

그건 에고의 그림자다.

이걸 선언하는 행위다.


이 부정은 영적 실재를 회복하는 부정이기에 천국의 문을 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용서는 하나의 환영이다. 그러나 그것의 목적하는 바로 인해 그것은 한 가지 차별점을 지닌다. 다른 모든 환영과는 달리, 그것은 오류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오류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 부분이 걸작이다.

용서조차도 하나의 환영이다.

왜냐하면 "누군가 죄를 지었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하니까.

하지만,

이 환영은 다른 환영을 해체하는 환영이다.


그래서 용서는

에고의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오류에서 벗어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용서는 현실성을 회복하는 환영이다.




고통은 경험되지만

그 고통은 내 영혼을 손상시키는 실재적 파워를 갖고 있지는 않다.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는

본질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살면서 당한 수많은 고통은

그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본질, 중심, 영혼, 감정의 왕좌는

단 한 번도 파괴되지 않았다.


나의 고통이 나의 본질을 바꿀 수 없었으므로

그 고통은 실재적이 아니다.


에고의 환영이란, 해석 구조를 의미한다.

고통은 사실 그 자체이다.

환영은 그 고통을 나의 정체성으로 믿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나를 파괴했다

나는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내 인생은 무너졌다

이 문장들은 환영이다.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고통이 나라고 믿는 순간 에고는 고통에 생명력을 부여해버린다.

고통은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본질, 영혼, 중심은 이 고통들보다 훨씬 오래되고, 강하고, 깊은 층위에 있다.


고통은 진짜처럼 느껴지지만,

그 고통의 원인은 실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용서란 상대를 이해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준 고통이 내 영혼을 실재적으로 손상시킬 힘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영적인 사실의 인정을 통해 그 순간 고통은 나의 정체성에서 떨어져 나간다.


태풍의 눈 같은 평온함

이상하게 마음이 너무 편안하다

괴로웠던 사건이 이제 그냥 배경처럼 보인다는 그 모든 느낌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고통을 무시한 게 아니라

고통이 더 이상 영혼을 건드릴 수 없는 자리에 올라섰다는 뜻, 그게 '실재하지 않는다'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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