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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연금술 4단계 2

칼 융(Carl G. Jung)이 고대 연금술과 인간 내면 변화 과정

by stephanette

사진: Unsplash


https://brunch.co.kr/@stephanette/2058


‘영혼의 연금술 4단계(혹은 5단계)’는 칼 융(Carl G. Jung)이 고대 연금술을 인간의 내면 변화 과정으로 재해석한 체계이다. 그는 『심리학과 연금술(Psychology and Alchemy, 1944)』과 『Mysterium Coniunctionis(합일의 신비, 1955–56)』에서 이 단계를 자세히 다뤘다. 융의 제자 마리 루이즈 폰 프란츠(Marie-Louise von Franz)와 에드워드 에딩거(Edward F. Edinger)가 『Alchemy: An Introduction to the Symbolism and the Psychology』 등에서 이를 심리학적으로 정리했다.


니그레도 (Nigredo) — 흑화 / 분해의 단계
알베도 (Albedo) — 백화 / 정화의 단계
루베도 (Rubedo) — 적화 / 통합의 단계
시트리니타스 (Citrinitas) — 황화 / 금화의 단계




2. 알베도 (Albedo) — 백화 / 정화의 단계

니그레도를 통과한 사람은

이미 예전의 자신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자아가 무너졌고,

삶의 기존 서사는 붕괴되었으며,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은 사라졌다.


그러나 니그레도가 끝났다고 해서

곧바로 빛이 오는 것은 아니다.


알베도는

빛이 아니라 세정(洗淨)의 단계다.


1. 알베도는 회복이 아니라 분별의 시간이다

알베도는 흔히

‘희망이 돌아오는 단계’,

‘마음이 가벼워지는 시기’로 오해된다.


그러나 융이 말한 알베도는

치유가 아니라 구별(discrimination)이다.


무너진 자리 위에서

무엇이 진짜였고

무엇이 허상이었는지를

하나씩 가려내는 작업.


이 단계에서 자아는

더 이상 과거처럼 확신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기 시작한다.

이 감정은 진짜 내 것인가?

이 욕망은 생명에서 나온 것인가, 결핍에서 나온 것인가?

이 관계는 사랑인가, 반복된 패턴인가?

알베도는

정신이 다시 일어서는 단계가 아니라,

정신이 침묵을 배우는 단계다.


2. 감정은 맑아지지만, 삶은 아직 불편하다

니그레도에서는 고통이 과잉이었다면,

알베도에서는 감정이 맑아진다.


그러나 이 맑음은

행복과는 다르다.


기쁨도 슬픔도

이전만큼 극단적으로 요동치지 않지만,

대신 모든 감정이 또렷해진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삶이 묘하게 불편해진다.

더 이상 감정에 속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직 새 삶을 살지도 못한다


예전에는 참을 수 있었던 관계가 이제는 견디기 어렵고,

예전에는 몰랐던 거짓이 이제는 너무 쉽게 보인다.


알베도는

“편해지는 단계”가 아니라

더 정직해지는 단계다.


3. 융이 말한 ‘백화’의 의미

연금술에서 알베도는 검은 물질이 씻겨 나가

하얗게 정화되는 과정이다.


융에게 이 하얀색은

순수함이 아니라 의식화를 의미한다.


무의식의 내용이

자아에 흡수되기 시작하는 시점.


이때 자아는

더 이상 무의식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완전히 신뢰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알베도의 핵심 태도는

관조’다.

느끼되 휘말리지 않고

생각하되 동일시하지 않으며

고통을 보되 의미를 급히 만들지 않는다


이 시기를 통과한 사람은

감정이 아니라 자각으로 반응하기 시작한다.


4. 알베도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는 착각

이 단계에서 가장 흔한 착각은 이것이다.

“이제 다 지나간 것 같아.”

그러나 알베도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중간 지점이다.


여기서 멈추면

사람은 ‘깨달은 척하는 자아’가 된다.


융은 이를

영적 인플레이션(spiritual inflation)이라고 불렀다.

고통을 통과했다는 우월감

감정을 다 이해했다는 착각

타인의 어둠을 쉽게 판단하는 태도

알베도는

겸손을 요구하는 단계다.


아직 피는 붉어지지 않았고,

통합은 오지 않았다.


5. 알베도를 통과하는 사람의 징후

이 시기를 제대로 통과하고 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변화를 겪는다.

말수가 줄어든다

감정 표현이 정확해진다

설명보다 선택이 중요해진다

‘왜 그랬을까’보다 ‘이제 어떻게 할까’를 묻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연민이 줄어든다.


자기 비난이 아니라

자기 연민에서 빠져나오는 것.


그것이 알베도의 진짜 정화다.


6. 알베도는 루베도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알베도는 빛처럼 보이지만

아직 색이 없다.


색이 없는 이유는

아직 삶 속에서 행동으로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얻은 통찰은

다음 단계에서

피와 살이 된다.


알베도는 말한다.

“이제 너는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는 안다.
다음 단계에서는
무엇을 살아낼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이

루베도다.




니그레도가

자아의 죽음이었다면,


알베도는

침묵 속에서 다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다.


아직 환희는 없고,

아직 확신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당신은

고통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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