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비대칭성이 생겨나는 과정, 관계 운영 방식에 대하여
관계는 대개 갑자기 무너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대놓고 불공정한 얼굴로 시작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많은 비대칭적 관계는 친절, 호감, 특별함, 이해, 사적인 신호 같은 얼핏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들 속에서 천천히 자란다. 그래서 더 알아차리기 어렵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게만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자기 컨디션을 말하고, 자신의 피곤함과 바쁨과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때로는 내가 이해해주길 바라고, 조금 더 배려해주길 원하고, 조금 늦어도 기다려주길 기대한다. 이런 순간은 관계를 특별하게 느끼게 만든다. 단순한 지인과는 다른 결이 생긴다. 나를 신뢰하나 보다, 나를 편한 사람으로 여기나 보다, 나와는 조금 더 깊이 연결되고 싶나 보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바로 그 다음부터 시작된다. 그 사람은 자기 힘듦을 말한다. 아프다거나, 피곤하다거나, 일이 많다거나, 상황이 복잡하다거나, 지금은 여유가 없다거나, 자기 상태를 설명하며 관계의 속도를 조절한다. 그리고 상대가 그 말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막상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내가 피곤하다고, 지쳤다고, 버겁다고 말하면, 그는 같은 깊이로 회신하지 않는다. 내 사정은 듣지 않거나, 듣더라도 자기 사정처럼 중심에 놓지는 않는다. 내 감정은 하나의 정보로 처리되고, 그의 감정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현실처럼 다뤄진다.
여기서 관계의 비대칭성이 만들어진다. 비대칭은 누가 더 많이 사랑하느냐에서 생기지 않는다. 누가 더 많이 책임지고, 누가 더 많이 조율하고, 누가 더 많이 감정 비용을 내느냐에서 생긴다. 한 사람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말하고, 설명하고, 기다리고, 이해하고, 배려한다. 다른 한 사람은 그 관계 안에서 이해받고, 고려받고, 자기 상태를 중심에 놓으면서도 같은 무게로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면 겉으로는 둘이 이어져 있어도 실제 구조는 이미 기울어져 있다. 한쪽은 관계를 짊어지고, 한쪽은 관계를 사용한다.
이런 관계는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불균형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다정하고 섬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비대칭은 무관심보다는 선택적 친밀감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는 친밀감을 원한다. 다만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의 친밀감을 원한다. 자기가 힘들 때는 이해받고 싶고, 자기가 바쁠 때는 기다려지길 원하고, 자기가 아플 때는 배려받고 싶다. 그러나 상대가 같은 방식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그에게 친밀감이 아니라 부담이 된다.
이런 사람은 정서적 연결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연결을 원한다. 다만 그 연결이 자기에게 위로와 이해와 안정감을 제공하는 방향일 때만 편안하다. 정서적 상호 책임의 형태가 되는 순간, 즉 상대의 피곤함과 복잡함과 불안을 함께 감당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는 뒤로 물러난다. 그래서 관계 안에서 이상한 장면이 반복된다. 그는 자신의 힘듦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 힘듦 앞에서는 갑자기 무거워한다. 그는 자신의 사정을 이해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내 사정 앞에서는 반응이 흐려진다. 그는 정서적 회신을 원한다. 그러나 정작 정서적 회신을 돌려주는 일에는 서툴거나 인색하다.
이것은 흔히 사랑의 부족으로만 설명되지만,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관계 운영 방식의 문제다. 친밀감은 원하지만 책임은 무겁고, 이해는 받고 싶지만 같은 깊이로 응답하는 것은 버겁고, 관계는 원하지만 상호성의 비용은 제한하고 싶은 사람들. 이런 사람과 만나면 관계는 거의 자동적으로 비대칭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이 비대칭을 더 오래 지속시키는 것이 바로 사랑에 대한 오해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이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니까 이 사람도 결국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사랑하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야지. 사랑하니까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지. 사랑하니까 지금은 힘들어서 그런 거겠지. 사랑하니까 받아줘야지. 문제는 이 생각 속에서 아주 다른 두 개가 하나로 섞인다는 데 있다. 하나는 수용이고, 다른 하나는 무제한 허용이다. 수용은 상대의 사정과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허용은 그 사정과 한계 때문에 내가 계속 손해 보고 소모되어도 그것을 감당하는 쪽으로 남는 것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사랑이 들어가면 사람은 자꾸 이 둘을 헷갈린다. 상대를 이해해주는 것이 곧 상대의 반복적 무책임을 감당하는 것처럼 바뀌고, 조금 더 기다려주는 것이 끝없는 유예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바뀌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관계의 비대칭까지 견뎌내는 것으로 바뀐다. 그 과정에서 사랑은 점점 자기희생과 닮아간다. 사람이 사랑하니까 받아줘야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사랑 자체가 본래 그런 것이어서가 아니다. 많은 경우 그 안에는 사랑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지금 밀어내면 끝날까 봐, 여기서 선을 그으면 차가운 사람이 될까 봐, 지금 거절하면 내가 덜 사랑하는 사람처럼 느껴질까 봐, 그래서 받아주게 된다.
또 하나는 상대의 현재가 아니라 가능성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힘들어서 이럴 뿐이라고, 원래 마음은 다를 거라고, 조금만 지나면 달라질 거라고, 조금만 더 이해하면 관계가 균형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는데도 마음은 계속 미래를 붙든다. 그러나 관계는 가능성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관계는 반복과 변화로 유지된다. 같은 문제가 몇 번 반복되었는지, 말 이후에 실제 변화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늘 한쪽의 사정만 중심이 되었는지, 함께 있을 때 몸이 편안했는지 아니면 점점 긴장했는지, 그것이 관계의 실체를 말해준다.
사랑은 상대를 이해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상호성이 없는 받아줌은 결국 사랑을 지키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받아줌은 사랑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비대칭을 연장한다. 한 사람은 점점 더 설명하게 되고, 점점 더 기다리게 되고, 점점 더 상대의 상태를 읽고 배려하게 된다. 다른 한 사람은 그 배려와 이해를 관계의 기본값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사랑은 애틋함이 아니라 피로가 된다. 친밀감은 안정감이 아니라 긴장이 되고, 배려는 자발성이 아니라 의무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몸이 먼저 안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이상하게 신경이 닳고, 설명되지 않는 긴장이 생기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어딘가가 위축된다면, 그건 단순한 예민함이 아닐 수 있다. 몸은 이미 관계의 무게가 어디로 쏠려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사랑은 다 받아주는 사랑이 아니다. 어디까지 가능한지 알고, 어디서부터는 내가 무너지는지 알고, 이해와 허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상호성이 없는 관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를 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를 잃어가면서까지 상대를 품는 일은 사랑이 아니라 소모에 가깝다.
결국 관계를 지키는 것은 강렬한 감정보다 반복되는 상호성이다. 서로 힘들 때 말할 수 있는가. 한쪽의 사정만 계속 중심이 되지 않는가. 말 이후에 실제 변화가 있는가. 함께 있을 때 몸이 편안한가. 배려와 이해가 한 사람의 의무가 아니라 두 사람의 리듬으로 존재하는가. 사랑은 받아줌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무한한 받아줌이 아니라 균형 잡힌 책임이다.
그러니 어떤 관계에서 계속 묻게 된다면, 왜 나는 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이해하고 있는데 정작 나는 이해받지 못하는가. 왜 그는 자신의 피곤함은 회신받고 싶어 하면서 나의 피곤함 앞에서는 멀어지는가. 왜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감당하게 되는데 그는 사랑한다면서도 같은 무게로 돌아오지 않는가. 그 질문은 사랑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오래 사랑의 이름으로 비대칭을 견뎌왔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마음 어딘가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 관계는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