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L’Amant

1992년작

by stephanette

1992년 처음 본 이후로 가끔 다시보는 영화다.

어떤 지점이 끌렸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도 비극적 사랑에 심취했던 시절이었던지도.

다만, 여자는 냉정했고 남자는 삶을 걸다가 망가졌다는 인상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둘은 같이 사랑했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사랑을 대한다.


남자주인공은

사랑에 절박하다.

점점 삶 전체를 흔드는 감정이 된다.

그의 사랑은

숨기기 어려워지고

상대에게 감정적으로 기울고

불안해하고

확인받고 싶어하고

관계를 실제 현실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의 사랑은 총량이 크다.

그리고 그 강도가 강해질수록 그는 취약해진다.

이 관계는 계급, 인종, 가문, 시대적 조건 속에서

얼마나 불안정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남자는 초조해진다.

그는 사랑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진실한 사랑만큼 그는 실제로 상처를 입는다.


여자 주인공의 사랑은

분명 감정이 있고, 끌리고, 흔들린다.

그러나 그 감정을 끝까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안착시키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그녀에겐 사랑보다 먼저 생존, 가족, 계급적 현실, 자기 미래, 부끄러움과 냉소로 인한 자기 감정에 대한 거리두기가 있다.

그녀는 사랑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면 자신이 취약해질 수 있다는 걸 이미 아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감정을 받아들이되, 끝까지 약간 비껴서 있다.

감정에 푹 빠져들기보다 자기 자신을 지켜보는 위치를 놓지 않는다.


그녀에게 사랑은 전부 맡기고, 운명처럼 믿고, 삶을 걸고 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통과해야 할 사건이자 자신의 삶을 스쳐지나가지만 오래 남는 어떤 강렬한 경험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필연적으로 엇갈린다.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을 놓는 자리가 다르다.

그는 사랑을 붙잡고 싶어하고,

그녀는 현재의 삶 위에 올려놓기엔 너무 위험한 것처럼 느낀다.

그러니 이 사랑의 비극은 진실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붙잡고 싶은 남자와, 지나가게 둘 수 밖에 없는 여자의 만남이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오래 지속되는 상실이자

그녀에게는 지나갔지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된다.


그는 사랑을 할 수 있지만, 삶은 살 수 없다.

그녀와 공적인 미래를 만들 수 없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도 없고

평등한 자리에서 서 있을 수도 없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으로 데려갈 수도 없다.

그러니 그는 삶을 걸고 그녀를 원하지만, 데려갈 수는 없는 사람이다.

남자의 사랑은 진심일 수 있어도,

그 진심이 현실로 구현될 자리가 없다.

그는 감정적으로 훨씬 깊이 들어가지만, 구조적으로는 여자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더 원할수록 불안해지고

더 사랑할수록 무력해지고

더 진심일수록 비참해진다.

줄 수 없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겪는 필연이다.


그녀는 그것을 안다.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도

그녀를 함께 살아갈 현실로 데려갈 수 없다는 것도

그래서 더 냉정해질 수 밖에 없다.


이 영화의 가장 슬픈 지점이다.

그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 말고는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사랑이어도

그 진심은 여자에게 미래가 아니라 순간이 된다.


남자는 사랑에서 무너져도 사회적으로 돌아갈 자리가 있다.

여자에게는 사랑의 실패는 직접적으로 삶 전체의 손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그보다 더 빨리 자신을 수습해야하는 사람이 된다.

여자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를 끝까지 지켜야 하기 때문에 멀어짐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사랑을 현재의 현실로 만들고 싶어하고,

그녀는 스쳐지나가는 기억 속의 강렬한 사건으로 남기려한다.


그녀의

더 멀어보이고

더 차가워보이고

더 먼저 끝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역설적이다.

사랑의 깊이를 먼저 알아버려서

더 깊게 다치지 않으려고

먼저 물러서는 모습일 뿐이다.

그녀는 그렇게 먼저 어른이 된다.


그들은 왜 만났을까?

외로움, 권태, 결핍, 자기 확인, 낯선 자극 같은 미세한 틈에서 시작되는 관계들이 있다.

삶이 너무 건조하고 막혀있고 각자 고립되어 있는 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틈새의 출구처럼 작동하는 만남


머리로는 계급도, 조건도, 미래가 없다는 것도 다 알고 있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꼭 계산이 끝난 뒤에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자기 안에 오래 억눌려 있던 욕망이나 인정받고 싶은 마음,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다는 충동이 건드려지면 알면서도 시작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다.


안된다는 것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르다. 종종 사람들은 안 될 걸 알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끌리기도 한다. 영원히 가질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의 강도를 더 높이기도 한다.


처음엔 끝까지 갈 거라 생각하지 않고 시작된 사랑의 가능성. 잠깐의 관계, 그 열기, 탈출로 여겼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런 관계가 종종 예상보다 훨씬 깊어져버린다는 것이다. 그저 잠깐의 스쳐갈 인연이 알고보니 진심을 건네는 그런 사랑말이다. 웃기다가, 너무 늦게 진심이 되어버리는 그런.


어떤 사랑은 시작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기 확인이기도 하다. 나는 아직 누군가를 원할 수 있는 사람인가. 나는 아직 살아있는 사람인가. 나는 아직 생생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사랑을 시작하기도 한다.


끝까지 갈 수 있어서 시작한 건 아니다.

지금 당장 견딜 수 없어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중에 더 비극이 된다.


잠깐 버티기 위해 시작된 사랑이

평생 지속되는 아픈 기억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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