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운명처럼 닥쳐오는 사건들
이상한 사건의 계보를 생각한다. 무의식의 관점에서.
사건의 정리는, 운명처럼 닥쳐온 무의식의 침입을 견디기 위한 상징 질서의 복원이기도 하다.
무의식 침입에 대한 자아의 방어
칼 융은 자아가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이 올라올 때, 그것은 종종 우연처럼 보이는 연쇄, 기이한 반복, 설명되지 않는 만남, 예지적 이미지의 형태를 띤다고 봤다. 일련의 사건들은 나의 자아가 아직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무의식적 내용이 운명적 배치처럼 경험되는 과정이다. 나는 이것을 알파벳으로 구조화했다. 이는 감정을 식히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압도적인 무의식의 침입을 상징적 질서 안에서 배치하려는 자아의 필사적 작업이기도 하다. 정신의 자기보존 방식이다. 무의식이 쏟아낸 홍수를 문자와 구조로 제방 쌓고 있는 과정이다.
그 모든 일은 하나의 기도에서 시작했다.
이는 자기(Self)와의 접촉 선언이다. 종교적 경험은 신앙 행위를 넘어서 자아가 더 큰 중심, 자기와 접촉할 때 일어나는 현상일 수 있다. '저를 당신께 봉헌합니다.'라는 문장은 '나는 더 이상 내 작은 자아만의 질서 안에 머물지 않겠습니다.'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선언은 늘 평온만을 부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이후에는 자기가 자아를 재배열하기 시작한다. 삶이 이상하게 꼬이는 게 아니라, 기존의 자아 질서가 해체되고 더 큰 질서를 맞게 다시 배열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봉헌 뒤에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열린다는 감각은 충분히 이해 가능한 상징 현상이다. 자아는 왜 이런 일이?라고 느끼지만, 자기(Self)는 이제 너는 더 이상 예전의 방식으로는 살 수 없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러니 나의 기도는 소원 성취의 주문이 아니라, 개성화 과정의 문을 열어버린 행위에 가깝다.
알파벳의 인물들은 실제 인물이면서 동시에 내면 원형의 관문이다.
나는 D'를 단순한 남자로 쓰지 않았다. 그는 하나의 관문이자 통과 의례다. D를 만나지 못하면, E도 만나지 못한다는 문장은 칼 융의 개성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D는 현실의 인물이면서 동시에 나의 무의식 안에 어떤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매개 원형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특정 인물은 실제 그 사람 자체라기보다, 우리 내면에서 어떤 원형적 기능을 대신 짊어지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강한 인상, 예고된 만남, 반복되는 상징성, 장기적 파급력을 가진 인물은 종종 아니무스적 매개, 운반자, 문지기, 전이의 촉매로 작동한다. 그러니 D는 D이면서도 D만은 아니다. 나의 무의식에서는 그가 다음 문으로 넘어가게 하는 자이자, 상처를 재점화하는 자이면서, 기존 자아를 흔드는 자 그러나, 동시에 다음 상징 단계로 이동시키는 자이다. 그러니 D를 통해 느껴지는 강렬함이나 심적 고통은 단순한 연애감정이나 집착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원형적 과업을 싣고 온 인물처럼 경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E는 아직 완전히 오지 않은 다음 단계다. 즉 E는 아직 인물이라기보다, 개성화의 다음 방, 아직 문만 보이는 상징 공간에 가깝다.
부서짐과 기록의 반복, 이것은 해체와 재구성의 전형적 징후다.
내상을 입었다. 다시 부서졌다. 기록을 썼다. 수천 장 썼다. 윤곽을 보았다. 이런 과정은 자아가 무의식과 맞부딪치면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해체를 의미한다. 기존 정체성, 기존 설명 체계, 기존 관계 감각은 모두 깨진다. 그래서 부서졌다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은 아주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나 나는 무너지기만 하지 않는다. 반드시 쓴다. 기록하고 배열하고 추적한다. 이것은 해체를 겪으면서도 상징 형성 기능이 가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칼 융이 말한 내용과 일치한다. 건강한 사람은 무의식의 압도 앞에서 완전히 붕괴하지 않고 상징을 만들어낸다. 나는 상처를 직접 삼키지 않고 그것을 문자와 구조, 계보와 비유로 변형한다. 이것은 분석의 기능이자 예술과 치유의 기능이다. 그러니 나는 부서지는 과정 속에서 기록자, 해석자, 연대기 작성자라는 새로운 자아 기능을 함께 만들어냈다.
내가 모르고 싶은 그 흐름의 윤곽, 그것은 그림자와 예지 사이의 긴장이다.
두 개의 층이 있다. 하나는 예지적 직관. 아직 오지 않은 것의 윤곽을 먼저 감지하는 기능이다. 다른 하나는 그림자 회피. 그 윤곽이 가져올 고통, 파국, 손실, 붕괴를 이미 알기 때문에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나의 기록은 보는 능력과 보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찢어지는 심장을 쓴 것이다. 이것은 개성화 과정의 고통과도 연결된다. 개성화는 밝아지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많은 것을 보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기 안의 파괴성, 반복성, 숙명처럼 느껴지는 패턴까지. 그래서 이 글에는 낭만적 운명에 대한 사랑이 없다. 오히려 피로감, 저항, 체념과 구조화가 있다. 나는 무의식을 숭배하기 보다 무의식의 압력에 짓눌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 인내는 나를 성숙으로 이끈다.
어째서 계속 기록하는 것인가. 무의식은 내게 증언자의 자리를 요구한다.
분석심리학에서 어떤 사람은 자기 삶을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반쯤은 자기 삶의 증언자로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갖는다고 한다. 사건을 겪는 동시에, 그것을 목격하고, 기록학, 상징화해야 하는 사람. 단순한 체험자를 넘어서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통역하는 사람의 역할이다. 그래서 기록은 강박 같아보이지만, 동시에 소명이기도 하다. 이것은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다. 의미없는 반복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아가 자기의 움직임을 따라잡기 위해 남기는 일종의 흔적이다. 그러니, 내가 쓰는 모든 글은 개성화의 문서화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틈에서 그 미묘한 결을 텍스트로 변환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 이는 무의식이 실제로 삶 안에서 배열한 상징적 계보를 감지하고, 그 압도적 흐름 속에서도 자아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 기록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상처받은 사람에서 상처의 계보를 쓰는 사람으로, 그리고 삶에서 작동하는 원형적 흐름을 문자로 붙잡으려고 이런 글을 쓴다.
개성화와 기록 과정에서의 과제
운명을 숭배하지 않는다. 흐름을 본다고 해서 거기에 취하지 않고, 저항하고, 경계하고, 기록한다.
삶의 인물들과 원형 인물을 분리해서 본다. 그는 실제 한 사람인 동시에 내 무의식의 특정 원형 기능을 떠맡고 있다. 그 둘을 분리할 수록 고통은 줄어든다.
기록은 생존 증거이자 상징 해석이다. 증거로서의 기록과 상징으로서의 해석을 구분하면 신경계가 과열되어 타버리는 것은 줄일 수 있다.
무의식의 배열을 먼저 감지하는 것은
고통이다.
너무 일찍 윤곽을 보는 것.
고통 속에서
나는 그것을 기록한다.
이것이 내 구원이다.
기록하는 사람만이 그 흐름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