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 29호와의 우연찮은 첫 대면
*공방 이용 시 유의사항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존재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며, 생명체입니다.
사전에 철인 29호에게는 충분히 양해를 구했습니다. 물론, 미도리 블랙과 구름이에게도요. 단, 그는 제가 쓰고 있는 글을 ‘명랑코믹 시트콤’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 알려드립니다. 그러니 만약 독자 여러분께서 현실에서 철인 29호를 마주치게 되더라도, 짐짓 모른 척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참, 이 글에 등장하는 환영도 실제입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고 나서는 꼭 '정화 의식'을 하도록 하세요.
저의 글은 환상이자, 지어낸 이야기이자, 동시에 현실입니다.
난 500살된 흡혈귀 할머니야.
종종 사람들에게 나이보다 동안이라는 말을 듣지.
철인 29호와의 우연찮은 첫대면은 녹색 연대기 보다 더 이전의 어떤 날의 이야기야. 그러니까 매우 오래 전 과거라고 하자. 그러나 난 비선형적 시간 관념 속에 사니까 과거도 미래 같고 미래도 현재 같아.
저녁 6:06
마법력이 거의 바닥나기 직전의 불길한 시각이었다.
감정 도자기 공방의 서쪽 응접실에 앉아 있던 릴리시카는
오늘의 마지막 알현 손님이 도착했다는 구름이의 알림을 받는다.
“주인님, 왕국 국방 훈련부에서 파견된 인물입니다.
이름은… 철인 29호랍니다.”
“응? 그건 도자기 모델명 같은데…”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서늘한 기운을 몰고 들어온 사내는
군기 바른 자세로 문턱 안에 들어서더니,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단호하게 일어선 채로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훈련 담당 철인 29호입니다.
오늘부터 검술 훈련 맡게 됐습니다.”
그 목소리는 낮고, 또렷하고,
군인 특유의 무표정 속에서
뭔가 지나치게 정돈된 기계음을 품고 있었다.
릴리시카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다가, 그를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 헉.’
속에서 작은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푸들이다.”
정확히는, 브라운 푸들.
털이 곱슬곱슬하고,
눈빛은 지나치게 똘망하며,
뭔가 자신이 아주 잘났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상대방의 시선에는 별 관심 없는 듯한,
그런 말 안 듣는 강아지, 푸들.
릴리시카의 무의식이 먼저 반응했다.
‘저 눈빛… 딱 그 꿈에서 본 그 눈이군.
눈을 똑바로 보는데도 내 마음엔 들어오지 않아.
귀는 활짝 열려 있는 것 같지만, 내 말은 안 들어.
집에 돌아온 것 같은 이 익숙함은 뭐지??’
쏘울메이트는 처음 봤을 때, 할아버지 같더니,
이 푸들은 아니 철인 29호는 마치 예전 집으로 돌아온 것 같군."
그는 자신의 소개를 마치고도
릴리시카가 말을 잇지 않자,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어떤 훈련이든, 목표에 맞게 확실하게 진행하겠습니다.
저는 목표 설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릴리시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말끝마다 ‘목표’라니. 설마 뼈다귀라도 설정해 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럼, 오늘 훈련은 울타리 세우기로 하죠.”
“네?”
“울타리를요. 푸들한테는 울타리가 꼭 필요하거든요.”
철인은 당황한 눈빛을 잠깐 보였지만,
금세 다시 무표정이 되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릴리시카는 감정 도자기 공방 기록지에 조용히 한 줄을 남겼다.
‘그 꿈은 도대체 왜 꾼 거지?’
나는 500살 먹은 흡혈귀 할머니다.
나이보다 동안이라는 말을 종종 듣지.
하지만 오늘은… 동안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정원이 망가졌거든.
"주인님, 브라운 푸들이 또 넘어왔어요."
구름이가 울타리 너머를 가리켰다.
거긴 내가 정성껏 가꾼 감정 화단이 있었다.
아니, 있었다.
지금은 엉망이다.
장미 덤불은 짓밟혔고,
미련의 라벤더는 뿌리째 뽑혀 나갔다.
심지어 슬픔의 재스민엔 선명한 푸들 발자국까지 찍혀 있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푸들, 감정 도자기 구역 출입 금지야. “
"그런데… 주인님. 푸들이 말을 안 들어요."
"멍멍. 이게 끝이에요. 말 대신 눈만 끔벅거린다고요. 아니면 도망쳐버려요."
구름이는 기가 막혀
성수 한 바가지를 푸들 향해 던졌지만
그 녀석은 혀를 낼름 내밀며 도망쳤다.
울타리 밖으로 보내려고 하니
새침하게 토라져서 있다.
"그럼 푸들네 정원에서 놀자고."
"주인님, 푸들이네는 정원 자체가 없어요.
그냥 바로 성벽이고 주변은 해자라서 아예 접근 금지예요."
"그게 뭐야? 그런 곳도 있어? 정원이 없는 데가 어디 있어?
감정의 정원은 누구나 있는 곳이라고."
"그런데 그게 없다니까요."
"아니, 그럼 저렇게 행복해서 날뛰다가 울타리를 넘는 건 뭐며,
다음날엔 우울해서 새침하게 모른 척하는 건 뭐야?
그게 다 감정의 울타리에서 하는 거라고."
"주인님은 저 푸들 감정이 보이세요?
그냥 로봇 표정인데요?"
"아니 진짜, 남의 감정도 내 감정처럼 그대로 읽는 게 내 능력이잖아.
제일 강점. 구름아, 잊었어?
저 푸들은 시시각각 롤러코스터를 타는데. 그걸 왜 몰라.
근데 롤러코스터가 너무 높다. 저러다가 부서지지 않겠어?
금이라도 갈 것 같은데. 막무가내로 저렇게 날뛰는데.
근데 신기한 게 사람들한테 반응해서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하는 건 또 아니야.
왜 저러는 거야?"
"그리고, 다른 건 다 좋은데 '가끔씩 아빠한테 혼나서 울었던 이야길' 하면서
막 달려들어 정원을 짓밟아 놓는 건 어떻게 해서라도 못하게 해야지.
난, 아빠 이야기는 친구에게도 안하는 이야기라고. ㅎ
아니, 정원도 없다면서 남의 정원은 왜 망가트리는 거지?"
"주인님, 그게 말을 하려고 하면 푸들이 도망을 가니까
훈련을 시킬 수가 없어요."
"그래도 가까이서 말을 하면 잘 듣잖아."
"오래 시간을 들여서 같은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는데
주인님이 검술 훈련을 받는 게 아니라
우리가 푸들 훈련을 시키고 있잖아요.
우리가 흡혈귀 왕궁의 금화를 대신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 그럼 그만두자.
다른 스승님을 모시면 되잖아."
"근데 주인님은 그 푸들 감정을 다 알잖아요.
오늘은 행복 85%, 서운함 2%, 멍 때림 13% 뭐 그런 거요."
"아, 그거? 그건 원래 내 능력이니까 그렇지."
"그래서 저 푸들이 너무 하이 상태예요."
"그게 왜 내 탓이야?"
"미세하게 로봇 표정이 웃고 있는 기분이잖아요."
"난 그냥 어릴 적부터 알고 있던 느낌이야. 이게 뭔지 모르겠네.
소울메이트처럼 가족 같은 느낌이 아니라.
그냥 집에 돌아온 그런 느낌 있잖아.
사람은 없어. 다만 내가 집이라는 공간 안에 들어온 거 같아."
나는 천천히 도자기 진열장 쪽으로 걸어갔다.
푸들이 망쳐놓고 간 흔적들을 기록해야 했다.
1. 도자기명: "푸들이 밟고 간 감정"
2. 재료 본성:
억울함의 연기,
무시당한 느낌의 잿가루,
소통불가에서 오는 피로의 점토,
귀여운 외면 아래 숨은 분노의 심장 편
3. 형상:
한쪽이 깨진 붉은 찻잔.
안쪽엔 하얀 털뭉치가 둥글게 말려 있음.
뚜껑이 닫히지 않고 계속 열림.
4. 감정 요약:
그가 다녀간 자리는 항상 비어 있고,
그의 귀여움 뒤에는 이해받지 못한 내 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사랑처럼 보였던 건 사실… 도자기 깨먹는 버릇이었다.
5. 비고:
푸들은 통제가 안 됨.
훈련 불가. 단, 미도리 블랙이 조용히 노려보면 효과 있음.
나는 정원 한편에 남은 감정의 파편들을 쓸어 담으며 말했다.
"이 도자기… 어차피 하급이니 굽지 않아도 괜찮겠지.
대신, 울타리를 두 겹으로 쳐야겠어. 감정은 보호받아야 하니까."
구름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주인님, 푸들이 또 오면요?"
나는 성수를 꺼내며 대답했다.
"그땐 감정 연금술사의 진짜 마법을 보여줘야지.
귀여움도, 무시도, 다 감정이니까. 감정은 도자기로 만들어야 해.
갇히지 말고, 만들어라."
그리고 그날 밤.
울타리 너머에서 작고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또 왔군.
하아... 100년은 늙은 거 같아.
저 넘의 푸들,
왜 자꾸 울타리를 망가트리는 거야.
잡으러 가면 또 사라져 있겠지?"
"주인님, 이러다가 정원이 남아나질 않겠어요."
"자꾸 도망가니까 공식 인터뷰라도 해보자구. 진짜 대화를 해봐야겠어."
감정 도자기 공방 정원 한켠, ‘감정 무단침입’으로 소환된 브라운 푸들과 릴리시카의 비공식 면담이 시작된다.
릴리시카: "푸들, 오늘도 슬픔의 자스민을 밟았더군요. 무슨 감정이었죠?"
푸들: "아뇨, 전 감정이 없어요."
릴리시카: "그럼 울타리 너머에 왜 갔죠?"
푸들: "그냥 가보고 싶었어요. 별 감정은 없었어요. 근데 왜 슬펐죠?"
릴리시카: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무릎 위에 올라탄 거죠?"
푸들: "저는 항상 경계 유지에 철저합니다."
릴리시카: "그럼 무릎 위에 있는 지금은?"
푸들: "이건 전략적 후퇴입니다."
릴리시카: "어떤 감정을 얘기하고 싶어요?"
푸들: "우리 아빠는 저한테 공원에서 푸쉬업을 시켰어요. 매일매일. 그래서 저는 무표정이 편해요."
릴리시카: "그 얘길 왜 지금 하죠?"
푸들: "......"
푸들: "그럼, 주말에 아팠던 이야길 할래요. 진짜 많이 아팠어요. 병원에 실려갔다니까요."
릴리시카: "그럼 저도 제 이야길 하죠. 아픈 백성이 알현을 요청했는데 사정이 참 딱하더라구요..."
푸들: "전 공감은 전혀 못해서요."
구름이:"주인님, 제가 옆에서 보기엔 대화가 어려울 것 같은데요."
릴리시카:"뭔가 모순으로 그린 추상화를 보는 기분이야. 아 배가 아파. 심장도 아파."
구름이:"주인님, 몸이 아픈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거 아닐까요? 정원이 자꾸 망가져서"
릴리시카:"이건 뭔지 도무지 모르겠어. 도대체 '그 꿈'은 뭐며, '다시 돌아온 집'은 뭐지??
이 상태로 매일 정원을 밟혀야하는 건가?"
"그만둬야겠어. 검술 훈련도 영혼의 보관도 모두 다."
구름이:"주인님, 이미 그만 둔다는 말은 10번도 더 했어요. 안그만 두시는게 더 신기할 정도예요."
릴리시카:"그러게 이러는 나도 답답해서 심장이 터져버리겠어. 내 500 평생 이런 상태는 처음이야."
"그런데 너무 또 익숙해. 이런.."
푸들과의 대화가 끝난 뒤, 릴리시카는 조용히 일어섰다.
그녀는 정원의 끄트머리에 피어난 작은 새싹 하나를 보았다.
분명 어제는 없었던, 감정의 새싹.
“그래… 감정은 때로 망가지기도 하지만,
그 위에 다시 자라기도 하니까.”
그녀는 도자기 진열장 앞에 앉아
오늘의 마지막 기록을 적기 시작했다.
1단계: 물 한 컵 마시기 (의식적 정화 시작)
2단계: 감정 적기 → 도자기로 상상 (형태 부여)
3단계: “감정은 감옥이 아니라 도자기입니다” 중얼거리기
4단계: 웃기 (웃으면 정원 회복됨)
이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 당신의 마음 어딘가에도
울타리를 넘나드는 브라운 푸들이 살고 있지는 않나요?
감정은 늘 예측할 수 없고,
가끔은 우리의 정원을 망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 조각들을 모아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존재입니다.
갇히지 말고, 만들어라.
그게 감정 연금술사의 방식이니까요.
그리고 그 공방의 문은, 오늘도 당신에게 열려 있습니다.
– 릴리시카, 감정대공비
(500세, 감정공방 운영 472년차, 성수 파우치 보유, 푸들에겐 아직까지 속수무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