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에게, 멈추지 않는 진동의 기억을 남겼다 그날 난 귀걸이를 잃었다
그는 입구에서 계산을 했다.
열려 있는 복도를 지나 출입문 근처에 선 나는 직원과 대화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내는 베이지 톤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열린 유리문은 블랙 철제 프레임으로 단정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그 검은 직선의 외곽선 한가운데 서 있는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장면은 마치 그가 미리 만들어둔 액자 같았다.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아무 어색함 없이 타인을 안으로 들이는 방식. 자연스러운 동선처럼 보이는데, 한 번 들어서면 이미 방향은 정해져 있는 것. 공항 활주로의 불빛이 그렇듯, 멀리서 보면 그저 반짝이는 안내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확한 착륙을 유도하는 신호인 것처럼.
그는 결정을 제안으로 만드는 데 능숙한 남자였다.
그래서 그 태도는 한편으로 몹시 매력적이었다. 누군가가 망설일 틈조차 어색하지 않게 줄여주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그 점 때문에 아주 얇은 종류의 불안도 함께 따라왔다. 거절하지 못한 제안을 받아 든 사람이, 뒤늦게 그것이 이미 결정된 방향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느끼는 종류의 것.
문득, 오래전 햇살이 눈부셨던 그날의 해수욕장이 떠올랐다. 거리는 한산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평일 오전이었다. 그래서 더 또렷하게 남았다. 대개 사람은 불행한 날보다 평온한 날에 벌어진 일을 더 오래 기억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을 한 시간 속으로, 전혀 다른 종류의 감각이 갑자기 밀고 들어올 때가 있으니까.
그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호텔에는 나 혼자였다. 일행들은 포스트잇 하나만 남기고 이미 밖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챙겨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아주 평범한 오전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문득 뭔가 이상했다. 처음에는 단지 몸이 너무 피곤한가 싶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잤나,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소리 내어 중얼거렸던 것도 같다. 그런데 그 말조차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내가 서 있는 공간이 현실에서 아주 미세하게 밀려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시 그 감각이 왔다. 간헐적이었고, 주기적이었다. 너무 미세해서 처음에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몸의 가장 조용한 곳이 먼저 알아챘다. 온몸이 아주 얇게 떨리고 있었다. 이상한 건, 그것이 내 안에서 시작된 것인지 공간에서 밀려온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내 몸과 방 전체가 같은 리듬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호텔 방은 박스를 양손으로 붙잡고 천천히 흔드는 것처럼 움직였고, 그 안에 서 있던 나 역시 그 흔들림에 맞춰 함께 흔들렸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것이 진동인지조차 바로 알 수 없었다. 파동은 한 번 멎는 듯하다가 다시 더 선명하게 밀려왔다. 몸 안의 감각이 방 안의 진동과 정확히 겹쳐지는 순간, 이유를 모르면서도 이미 알게 되는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그때 사이렌이 울렸다. 갑작스럽고, 크고,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리가 너무 커서 오히려 뜻이 지워졌다. 잠깐 뒤에야 그것이 지진 경보라는 걸 알았다. 나는 옷가지를 든 채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나.” 그 생각이 먼저 스쳤다. 손은 이미 버튼 쪽으로 가 있었고, 동시에 몸은 그 결정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일행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지진의 매뉴얼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째서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심장의 빠른 심박수는 다른 기억들을 눌러버렸다. 떠올리지 못하는 매뉴얼의 순서들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행동의 순서와 의미 그리고 중요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 지진의 강도에 따라 진행되어야 하는 그런 행동 요령들을 나는 하나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그 지진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가 다시 취소하고 계단으로 향했다. 그것이 맞는 것인지도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숨이 이상할 만큼 빨리 차올랐다. 그건 단순한 놀람이 아니었다. 몸이 먼저 알고 있는 종류의 감각이었다. “이렇게 다 끝나버리는 걸까.” 그 생각은 아주 짧았는데, 감각은 그보다 훨씬 길었다. 안쪽에서부터 깊고 곧게 갈라지는 것 같은 느낌. 피하고 싶은데도 감각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그 진동은 계속 따라왔다. 이미 멎은 것인지, 아직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것인지, 내 몸 안쪽이 같은 리듬을 계속 되살리고 있는 것인지도 구별되지 않았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것은 의식보다 빨랐고, 그래서 더 낯설었다. 빠르게, 그러나 동시에 어딘가 느리게.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을 내 의식은 끝내 따라가지 못했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느낌이었을까.
죽음의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발버둥이었을까.
죽어버린 삶에서 튀어나가려는 의지였을까.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거리감을 좁히는 일을 포기했다. 몸과 생각 사아에 벌어진 틈을 따라잡지 못한 채, 그냥 생각하기를 멈췄다. 그런 순간이 있다. 두려움과 망설임은 이미 지나갔는데, 몸만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순간. 사이렌은 끊길 듯하면서도 끝내 멈추지 않았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소리로 계속 울렸다. 나는 그 소리에 몇 번이고 스스로 놀랐다.
호텔의 계단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다리는 후들거렸고, 나의 몸은 이상할 만큼 낯선 곡선을 그리며 그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내려가는 몸의 움직임과 위로 치솟는 심장의 박동이 어느 순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나는 아주 얇은 경계 하나를 넘어서는 감각을 느꼈다.
나는 거의 그 상태로 밖으로 나왔다. 사이렌은 아직 내 안에서 울리고 있었고, 거리에는 환한 햇살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쏟아지고 있었다.
호텔 밖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햇살은 여전히 눈부셨고, 거리는 한산했고, 평일 오전은 너무 평온해서 조금 전까지 나를 통과했던 그 흔들림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그 낯선 평온 속에서 잠깐 멈춰 섰다. 내 안에서는 분명 무언가가 갈라졌는데,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일행들을 만났을 때 나는 거의 숨을 몰아쉬듯 말했다.
“무서웠어.”
그런데 돌아온 얼굴들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무슨 일이야?”
“지진 났는데 몰랐어?”
“지진? 우린 몰랐는데.”
“호텔 꼭대기에선 심하게 흔들렸어.”
“그래? 우린 장 보느라 영 몰랐네.”
그 순간 알았다. 어떤 감각은 모두에게 같은 밀도로 도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진동은 오직 한 사람의 몸 안에서만 완성된다는 것을. 같은 날,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안에 있어도 누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가고, 누구는 그 감각을 수십 년 동안 품게 된다는 것을.
한 번 흔들린 자리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감각을 오래 가지고 있었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리듬. 아주 미세해서 남들은 모를 수도 있지만, 내 몸은 한 번 알아버린 뒤로 끝내 잊지 못하는 종류의 파동.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안쪽에서는 이미 시작되어 버린 흔들림. 멎은 뒤에도 오래 남는 경보.
그는 나에게 그날의 해수욕장이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내 안에서는 이미 시작되고 있던 진동,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한 세상 속에서 혼자만 먼저 알아차린 흔들림, 멎은 뒤에도 한참 동안 몸 안에 남아 있던 그 리듬. 그 이전의 모든 매뉴얼들이 소용없어지는 그런 순간. 그와의 만남이 꼭 그랬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안쪽에서는 이미 모든 것이 아주 미세하게 어긋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고,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몸은 이미 먼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그렇게 나에게 그날의 해수욕장과 끝내 멈추지 않던 지진 경보를 남겼다.
그리고 나는 그날, 귀걸이 하나를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