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지진 경보, 그 남자 007

말해놓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by stephanette

나는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그 작은 각도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느리게 출렁였다. 크리스털이 촘촘히 박힌 진주 귀걸이가 귓불 아래에서 작게 흔들렸고, 그 미세한 진동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차갑고 서늘한 그 감각이 파동처럼 번져 목 언저리에 닿았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날 밤은 그런 식이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 하나가 예상보다 오래 몸 안에 남았다.


나는 가끔씩 목 언저리에 다시 그 청량함을 느끼고 싶어졌다.

체온을 식히려는 몸짓처럼.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둘 다 어딘가를 조심스럽게 비켜가고 있었고, 그래서 대화는 몇 번이고 닿을 듯하다가도 곧바로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분명 말을 나누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계속 비어 있었다. 그 비어 있는 중심을 둘러싸고 문장들만 맴도는 느낌. 그런데도 그 공백은 불편하기보다 오히려 더 또렷했다. 사람은 가끔, 직접 말하지 않는 것들 때문에 더 깊이 흔들린다.


이야기는 선과 악의 문제 쪽으로 흘러갔다. 그의 말이 끝난 뒤, 나는 문득 입을 열었다.

"악한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잖아요."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내가 먼저 놀랐다. 왜 하필 그 문장이었는지, 왜 그 말을 여과 없이 던졌는지 바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생각 끝에 고른 문장이 아니라 거의 튀어나온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후회보다 먼저 그의 얼굴이 궁금했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빛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다. 입매 주변으로도 얇은 표정 하나가 스쳤다. 미소라고 부르기엔 너무 짧았고, 무표정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분명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내가 원한 건 그의 대답이 아니었다. 그 문장이 그의 얼굴 위를 지나갈 때 생기는 아주 짧은 흔들림, 바로 그것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찰나만큼은,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조용히 되살아날 것 같던 향수병 같은 통증이 잠깐 멎은 듯했다. 마치 아주 잠깐, 어딘가에 닿은 것처럼. 그러나 그의 눈은 끝내 읽기 어려웠다. 그래서 더 보고 싶어졌다.


그의 뒤로 검은 천장이 보였다. 그 위에 촘촘하게 박힌 작은 전구들 때문에 그는 꼭 별빛 한가운데 놓인 사람처럼 보였다. 현실의 한 남자라기보다, 잠깐 잘못 들어간 장면 속에 놓인 인물처럼. 나는 순간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고, 숨의 끝자락에는 아주 가느다란 저림이 남았다. 원근감이 조금 흐려졌다. 화면의 정중앙을 차지하던 그의 위압감도, 그 순간만큼은 묘하게 느슨해졌다. 어떤 이야기 끝에서는 그는 아주 잠깐, 이유 없이 슬퍼 보이기도 했다. 바로 그 점이 더 위험했다. 단단한 사람보다 아주 잠깐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 더 오래 시선이 머무를 때가 있다.


"별이네요."

나는 다시 같은 말을 했다.


쓸데없는 말은 평소에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 밤은 평소와 달랐다. 나는 뜬금없이 요리를 칭찬했고, 별빛 이야기를 두 번이나 했고, 그 말들이 하나같이 조금씩 어긋나 있다는 걸 말해놓고 나서야 알았다. 말해놓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내가 왜 웃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알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자기답지 않은 말을 할 때는 이미 안쪽에서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여전히 끝까지 잡히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가끔 그 안으로 짧은 반짝임이 스쳤고, 드물게는 미소 같은 것이 지나갔다. 그건 분명한 호의처럼도 보였고, 동시에 아주 조금의 거리처럼도 보였다. 그래서 더 지독했다. 가까워지는 것 같은데도 완전히 닿을 수는 없는 표정. 그런 건 사람을 오래 흔든다.


때때로 그는 내 앞의 투명한 작은 잔에 청주를 따라주었다. 넘치지도 않게, 모자라지도 않게. 이상하리만치 정확한 높이였다. 그 정밀함이 묘하게 나를 긴장시켰다. 술을 따르는 일은 사소한 행동인데, 어떤 사람들은 그 사소함조차 자기 방식으로 만든다. 그의 손은 늘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더 오래 남았다. 맑은 액체의 수면이 별빛을 받아 아주 잠깐 흔들렸고, 나는 그 작은 떨림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내 안쪽도 비슷한 높이로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를 흔든 것은 대단한 고백도 아니었고 뚜렷한 접촉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짧게 반짝이는 눈빛, 끝내 다 읽히지 않는 표정, 조금 웃긴 말을 해버린 뒤의 나 자신의 낯섦, 그리고 청주가 잔 안에 정확히 채워지던 그 높이. 사람은 때로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정교한 사소함에 빠져든다. 그래서 더 늦게 알아차리고, 더 오래 못 빠져나온다.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앉아 있었다. 여전히 친절했고, 여전히 자연스러웠고, 여전히 모든 것을 적당한 높이로 맞추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도 그날 밤 내 안에서 조용히 무너지고 있던 것은 분명 있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지만, 실은 점점 더 그의 표정과 손끝과 눈빛의 미세한 질감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에게 빠져드는 순간은 늘 설명보다 조금 늦게 온다. 그리고 대개는, 이미 늦은 뒤에야 자기 정체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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