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커피를 내렸다.
아침에 눈을 뜨자 방 안의 공기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도, 테이블 위에 놓인 컵도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몸이 먼저 알고 있는 변화라는 게 있다. 나는 잠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움직이지 않은 채 호흡의 길이를 가늠했다. 조금 느려져 있었다.
주방으로 가서 물을 올렸다. 주전자 안에서 작게 끓어오르는 소리가 생각보다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원두 봉투를 열었다. 어제보다 향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같은 원두인데도 감각이 다르게 받아들이는 날이 있다. 나는 계량하지 않고 그대로 갈아 넣었다. 손이 기억하는 양은 생각보다 정확하다.
물을 붓기 전에 잠깐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점드립으로 이어갔을 텐데, 오늘은 조금 천천히 하고 싶어졌다. 느려진 호흡에 맞춰서. 종이를 적시고, 30초 정도 기다렸다. 그 사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짧은 공백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천천히 내려갔다. 검은 원두 위로 둥글게 부풀어 오른 곡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풍만한 곡선을 따라 어제 일을 떠올랐다. 심장이 박하로 만들어진 것만 같다. 미열이 나는 것만 같은 자잘한 근육통의 느낌들이 온몸에 남아 있다. 물줄기의 둥그런 움직임을 따라 부풀어 오른 곡선은 미묘하게 달라졌다. 작은 균열들이 생겼다가 짙어지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손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어딘가에서는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는 느낌이었다.
커피를 컵에 따랐다. 수면이 출렁인다. 심장에서 박하향이 올라오는 것만 같다. 미세한 화끈거림은 사방으로 퍼져간다. 잃어버린 귀걸이를 떠올렸다. 그에게 그걸 말할까 생각했다가 지웠다. 커피잔 안의 그 흔들림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나는 컵을 들어 입술로 가져갔다. 뜨거운 온도가 천천히 닿았다. 남아 있던 촉감이 가졌던 그 온도의 기억을 그렇게 지웠다. 왼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만졌다. 입술의 경계를 따라 천천히. 선명했던 기억은 조금 더 아래로 묻혀간다. 조금 더 오래 그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 급하게 마시고 싶지 않았다.
"잘 잤어요?"
커피를 다 마시고 창 밖의 푸른 나무를 보다가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반말로 대답을 했다.
어색한 반말을 하기엔 아직 그는 낯선 사람이다.
어제의 일은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천천히 아래로 침잠한다. 기억이라기보다 잔류하는 감각에 가까웠다. 어떤 순간을 지나고 나면 그것은 언어로 정리되지 않는다. 말로 변환되지 않은 감각은 그 상태 그대로 보존된다. 조금 더 두고 본다. 그 감각이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나는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에게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가끔 연락이 끊기거나 가끔 이상하게 낯설었다. 그러나 물어보지 않고,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에게 딱 필요한 적당한 만큼. 그게 이상하지 않았다. 굳이 무언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커피를 한 잔 더 마셨다. 온도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 처음보다 부드러워졌다. 나는 그 차이를 음미하며 느꼈다.
어떤 것들은 명명하는 순간 가벼워진다. 주변부가 깎여 나간다. 언어의 굴곡에 맞추어서 그 형체는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그 상태를 그대로 두는 쪽을 택했다. 설명하지 않고, 정리하지 않고, 그저 통과시키는 것. 그리고 그저 하루를 살아간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공기가 천천히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이상하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사실, 난 1:1로 남자를 만나진 않아."
"응?"
"늘 그랬어."
"그래?"
"응 말로 안 해서 사람들은 모르지."
"나 때문에 깨졌네."
"아니, 내가 변하는 시기라서."
누군가와 가까워진 뒤에 더 또렷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건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 선명하게 느끼는 순간이다. 나는 그 상태를 지켜보는 것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흔들리는 것은 원치 않았으니까. 갖고 있던 원칙들이 깨어지는 순간들과 그걸 잃은 내가 하는 행동들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대면한다.
컵을 내려놓고 손목을 가볍게 쓸었다. 맥박이 아주 얇게 뛰고 있었다. 나는 그 리듬을 잠깐 느꼈다. 그는 아마 이 순간을 모를 것이다. 그 이전의 나와 변해가는 나에 대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커피를 내리고, 그 사이에 무언가가 조금씩 달라진다. 모든 감각은 공유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것들은 혼자 알고 있는 편이 더 선명하다.
커피가 거의 식어갈 즈음 나는 마지막 한 모금을 마셨다. 처음과는 다른 맛이었다. 조금 더 부드럽고, 조금 더 깊었고, 조금 더 늦게 남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알게 되었다. 어떤 순간들은 지나간 뒤에야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감각들은 끝난 뒤에야 제대로 형태를 갖는다는 것을.
나는 컵을 씻었다. 물줄기가 잔 안을 천천히 채웠다. 모든 것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잡고 있는 그 아래에서 나는 달라진 나를 발견했다. 아주 미세한 진동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는 종류의 것. 나는 그 실마리를 따라가서 나를 만난다. 예상하지 못했던 그 모습에 당황하지 않고 덤덤하게 있는 그대로.
만약
그를 다시 만나는 순간이 있다면,
정확하게 아는 것이 있다.
나는 존댓말을 할 것이다.
낯선 거리 그만큼.
경계에서도 선명하게 측정할 수 있는 바로 그 거리에 맞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