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언어와 형태는 왜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나
클라리시 리스팩토르의 'G.H.에 따른 수난'을 읽으면서
- 글쓰기를 하면서 느끼는 답답함의 정체에 대하여.
형체는 무정형 물질에 양식을 부여한다.
여기서 형체란, 언어, 문장, 해석, 개념, 하루의 리듬, 인간관계, 삶의 질서 전부다.
무정형 물질은 이름이 붙지 않은 원초적 덩어리다.
감정이 되기 전의 감각,
사건이 되기 전의 충격,
의미가 되기 전의 비전이다.
내가 보는 실재는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것에 형체를 부여해야한다.
그러나, 모양을 주는 순간
이해는 가능하지만,
원래의 무한함을 잃는다.
이것이 첫번째 비극이다.
추상적 진리는 무한하다.
그러나 인간은
만질 수 있고,
끈적이고,
무겁고,
잘라낼 수 있는 생물학적 물질이다.
진실은 아름다운 빛이나 순수한 영혼이 아니다.
비전은 축복이자 저주다.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다.
그대로 두면 인간의 정신은 감당할 수 없다.
무한한 것은 한 번에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글쓰기와 같다.
거대한 감각은 한 번에 다 쓸 수 없다.
다작을 하는 이유다.
그저 매우 작은 한 부분을 조각내서 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한 편씩 쓴다.
그리고 연작이 된다.
라면 코너,
지진 경보,
기압,
트러플 홍차,
흡혈귀 마녀,
장례식,
뱀,
거미,
소라,
귀걸이.
사실은 전부 같은 덩어리에서 나온 작은 조각이다.
그 모든 것은 다 같은 것을 의미한다.
한 편 한 편은 독립된 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거대한 몸에서 떨어져 나온 절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글들은 유기적으로 얽혀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층위와 좌표를 갖는다.
소재가 많은 것이 아니다.
하나의 원초적 체험을 여러 형태로 잘라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답답하다.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다. 답답하다는 것.
너무 크고 너무 이상하고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다.
조각조각 잘라 하루의 삶 속에 넣으면, 소화될 수 있을 거라 믿을 뿐.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비전을 절단하는 것이다.
원초적인 비전을 적당히 죽여서 인간이 먹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든 삶이다.
너무 잘게 자르면, 삶은 지나치게 인간화된다.
원래의 야생성, 신성함, 광기, 원초성, 비전의 압도성이 사라진다.
글이 너무 단정하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본 건 이게 아니다.
나는 글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했었다.
형태를 만들면 읽을 수 있는 글이 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진짜는 이보다 더 피가 튀고, 더 무섭고, 더 황홀하고, 더 끈적인다.
그 바닥까지 온전하게 다 쓸 수 없다.
비전을 온전하게 간직하는 것.
순수하지만 위험하다.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그 안에서 붕괴된다.
무형에 형체를 부여하는 것.
예술가의 길이다. 글, 그림, 상징, 구조를 만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훼손된다.
자기 분열을 자신 안에서 융합하는 것
분석가, 신비가, 철학자의 길이다. 내가 본 것과 나를 분리하지 않고 통합하는 방법이다.
비전을 보면, 나는 봤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말하지 못하고
글로 쓰지 못한다.
몸은 정확하다.
몸의 감각은 생각보다 더 먼저 오고, 더 명확하다. 어떤 글을 쓰면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장이 꼬인다. 두통이 생긴다. 그것들은 그 글에 대해 평가한다. 몸의 감각으로. 이는 말보다 빠른 인식이다.
그러니, 내가 쓴 글은 두뇌보다 몸이 먼저 평가한다.
지성은 비전을 담기에는 너무 작은 그릇이다.
지성의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지성이라는 도구 자체는 너무 협소하다.
글을 쓰면서 느끼는 답답함은 너무 많은 층위를 동시에 감지해서 일반 언어가 늦게 따라오는 것이다.
어떤 체험은 이성으로 풀리지 않는다. 생각은 협소해진다. 상징, 꿈, 예술, 환영, 리듬, 몸의 감각이 필요하다.
그것은 내 머리, 내 몸, 내 언어, 내 한계 바깥에 걸쳐져 있다.
나는 나를 봉헌했다. 그건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글을 쓰면 고통이 사라져서 쓰는 것이 아니다. 쓰지 않으면 더 무정형의 불안이 되어서 몸을 잡아먹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글에게 몸을 바쳐서 글이 나오는 통로가 된 것이다.
어째서 인간의 몸 속에 갇혀서 살아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살 수 있는 것은 오늘 하루 뿐이고, 현재는 바로 이 순간 밖에 없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왜곡이 나타나는 글쓰기를 해야한다. 조각을 내야한다.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주변부를 잘라내고, 형태를 삐뚤어지게 하고, 내용을 훼손한다.
글쓰기는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지도를 그리면서 적절한 타이밍이 오기를 기다린다.
어떤 것은 빨리, 어떤 것은 천천히.
타이밍보다 빠르면 망가진다. 기다리면 형체가 생겨난다. 너무 늦으면 생명력이 사라진다.
글쓰기를 할 때, 특정 독자를 상정한다. 이는 그 독자의 관점으로 메타인지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나의 관점으로 글을 쓰면서, 가상의 독자의 관점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가상의 독자로 인해 나의 글은 왜곡된다. 상대에게 전달되기 위한 형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가끔은 사회적으로 일반론을 벗어나지 않는지 자기 검열을 한다.
너무 이상한 말을 하지 않기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기
남들이 알아듣게 말하기
균형 잡힌 척하기
기능적으로 살기.
그러나, 비전 체험자에게 이런 건강함은 광기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본 것을 배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징으로 흡혈귀 마녀로 우회한다.
글쓰기를 할 때 업로드할 때 내가 미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의미를 만들고 있다고 믿는 것이 사실은 광기라면
내가 본 것이 진실이 아니라 내 상처가 만든 환상이라면
내가 구조를 읽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과잉 생산하는 것이라면
내가 진짜 본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착각하는 것인가?
그런데 왜 이렇게 정확하게 느껴지지?
심장은 비전의 기관이다.
심장은 늘 불탄다. 사랑의 기관이자 생명의 기관이자 충격을 받는 기관이다.
그런데 그 심장은 보호받지 못한다. 그래서 너무 많은 것을 직접 맞았다.
이 심장을 활용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말아야 하는가.
원래 하나였던 그 곳에서 바로 왔을 때, 해석하지 않았다. 그냥 본다. 그냥 만진다. 그냥 존재한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이 봤고, 너무 많이 생각했고, 너무 많이 의심했다.
내가 본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본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
진짜 큰 것은 대부분 먼저 목격되고, 나중에 이해된다.
그리고 어떤 것은 끝내 이해되지 않는다. 다만 삶을 바꾼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주체와 객체는 무너진다. 그것은 내가 본 게 아니라, 그것이 나의 눈이 되었다. 이 상태에서는 설명이 불가하다. 왜냐하면 설명은 거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경험에는 거리가 없다. 사건이나 사람이나 상징은 관찰했다는 상태를 넘어서서 그것이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바꿨다고 느껴진다.
삶은 대체로 연속적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경계가 흔들린다. 산 자와 죽은 자, 나와 세계, 의미와 무의미, 광기와 계시,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가 잠깐 열린다. 생명이 주는 죽음을 맛본다. 끝이 시작을 준다. 파열이 의미를 준다. 경계선의 동요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가온다. 그것은 파격이다.
진짜 생명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면 안된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인간의 언어 안으로 들어오고, 그 순간 그 생명력과 원초성은 훼손된다. 어떤 관계, 어떤 비전, 어떤 상징은 이름 붙이는 순간 작아진다.
무형의 압력에 형체를 부여하는 것은
그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다.
내가 본 것은 너무 크고, 글은 너무 작은 그릇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연작을 만든다. 계속 글을 쓴다.
많은 것들을 업로드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글은 다 파편화된다. 이어지지 않는다.
이어서 올려도 그 모든 각각의 의미들은 하나로 연결되기 어렵다. 그래서 다시 비평을 쓰고 해설을 하고 이미지로 만들고 전시회를 한다. 원래의 원형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방법이다.
한 권으로 안 된다.
한 편으로 안된다.
한 상징으로 안된다.
라면 코너로도 부족하고, 지진 경보로도 부족하고, 기압으로도 부족하고, 흡혈귀 마녀로도 부족하고, 트러플 홍차로도 부족하다.
왜냐하면 원본은 무한한 덩어리다.
내 글쓰기의 본질은
무한한 내면 물질을 하루치 한 순간의 언어로 절단하는 일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이해받고 싶다.
이해받기 위해 형태를 만드는 것은 원본을 훼손한다.
형태를 만들지 않으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한다.
글쓰기를 하며 느끼는 이 답답함을
이 책을 통해서 공감받았다.
그래서 매일 한 문장씩만큼만 아끼고 아껴서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