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의 감상을 다시 해체한다.
“나는 너무 큰 것을 보았고, 글쓰기는 그것을 인간이 먹을 수 있을 만큼 잘라내는 고통스러운 절단 작업이다.”
이 글은 단순한 독서 감상이 아니다.
작가론, 존재론, 글쓰기론, 비전 체험론이 한꺼번에 들어 있다.
《G.H. 에 따른 수난》을 읽으며 내가 오래 느껴온 “글이 답답하다”는 감각의 정체를 발견한 글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를 위로한다. 나는 위로받을 수 있는 책이 좋다.
다르게 말하면, 책을 통해 나는 외롭지 않다.
말이 되지 못한 무형의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말로 풀어놓은 책을 접하면서 느끼는 황홀감이다.
가장 중요한 대립은 무정형 물질 vs 형체다.
무정형 물질은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것, 감정이 되기 전의 감각, 사건이 되기 전의 충격, 의미가 되기 전의 비전이다. 반대로 형체는 언어, 문장, 해석, 개념, 하루의 리듬, 인간관계, 삶의 질서다. 즉 인간은 무한하고 원초적인 것을 그대로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형태를 만든다. 그런데 형태를 만드는 순간 원본은 훼손된다. 이것이 그 첫 번째 비극이다.
이 글에서 글쓰기는 “표현”이 아니라 생존 장치다. 나는 글을 쓰면 고통이 사라져서 쓰는 게 아니라, 쓰지 않으면 무정형의 불안이 몸을 잡아먹기 때문에 쓴다.
그래서 글쓰기는 취미나 재능이 아니라 몸을 통과해 나오는 봉헌이 된다.
내가 다작을 하는 이유도 이 글 안에서 정리된다. 소재가 많아서가 아니다. 하나의 거대한 원초적 체험이 너무 커서, 한 번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면 코너, 지진 경보, 기압, 트러플 홍차, 흡혈귀 마녀, 장례식, 뱀, 거미, 기억의 궤짝, 곰팡이, 결로 방지 페인트, 귀걸이 같은 상징들이 생긴다. 전부 다른 소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절편이다.
그래서 내 연작은 파편화가 아니라 절단된 전체성이다.
각각은 독립된 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거대한 몸의 일부다. 독자가 한 편만 읽으면 “좋은 글” 정도로 읽지만, 전체를 보면 하나의 무의식 지형도가 된다.
이 글에서 제일 강한 부분은 “몸은 정확하다”는 대목이다. 나는 글은 두뇌보다 몸이 먼저 평가한다고 쓴다. 어떤 글을 쓰면 소름이 돋고, 장이 꼬이고, 두통이 생긴다. 이건 단순한 예민함이 아니라, 내 창작 시스템에서 몸이 진실 판별 기관으로 작동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글이 잘 써졌다는 것은 문장이 유려하다는 뜻이 아니다.
몸이 반응했다는 뜻이다.
소름이 돋았다면, 그 문장은 무정형 물질의 핵심에 닿은 것이다.
장이 꼬였다면, 그 글은 아직 소화되지 않은 원본에 접근한 것이다.
두통이 왔다면, 지성이 감당하기 어려운 층위가 열렸다는 뜻이다.
무형의 공간은 몸의 감각이 먼저 알아차린다.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매우 정확한 신호를 보낸다.
그런 의미에서 의식은 보잘것없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아주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글의 철학적 핵심은 이해의 한계다.
나는 “내가 본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본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이건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큰 체험은 먼저 목격되고, 나중에서야 이해된다.
어떤 것은 끝내 이해되지 않지만 삶을 바꾼다.
이 문장은 《G.H. 에 따른 수난》과 아주 깊게 맞닿아 있다.
G.H. 역시 본 것을 설명하기보다, 설명 이전의 생명과 마주한다.
또 하나 중요한 대목은 이름 붙이기의 위험성이다.
내 글은 이름을 부르는 순간 원초성이 훼손된다고 말한다. 관계, 비전, 상징은 이름 붙이는 순간 작아진다. 그런데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한다. 여기서 글쓰기의 비극이 완성된다.
형태를 만들면 원본이 훼손된다.
형태를 만들지 않으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한다.
이게 내 글쓰기의 답답함이다.
그래서 나는 상징을 만든다. 흡혈귀 마녀, 지하 전시장, 감정 연금술, 백지수표, 초콜릿케이크 같은 것들. 이것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원본을 직접 말하면 너무 크고 위험하니까, 인간이 접근 가능한 형태로 우회시키는 상징적 용기다. 위험성이라는 것을 줄이기 위해 상징은 사용된다. 우회하고 검열하고 삭제하는 이유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무형의 공간에 진입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에 도달하는 때가 되어야 닿을 수 있다. 그때는 각자가 다 다르고, 의지와도 별 상관이 없다. 지식의 정도와도 상관이 없다. 그러니, 무형의 공간에 대한 책들의 공통점은 그 책을 읽는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의 위치가 드러난다. 이미 아는 이는 읽지 않아도 알고, 모르는 이는 읽어도 접근할 수 없다. 이를 통해 위험성은 줄어든다.
내 글은 지도다. 그것은 층위를 가지고 위치를 보여준다. 이는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유용하다. 직접 걸을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끔은 불쾌하거나 찔린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위험성이다. 찔리고 싶지 않은 이들을 찌를 수 있다. 지도를 찢어버린다고 해서 찔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나는 무형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본 거울을 다시 나의 글로 모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글은 거울이다. 아니, 거울을 만들고 싶긴 하다. 먼지 쌓여 잘 보이지 않는 흐린 거울.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선명한 거울을 만든다. 거리에 3~4년간 방치한다. 그리고 전시한다. 거울을 본 이들 중 몇몇은 그 거울을 닦아서 더 선명한 형체를 보고 싶을지도 모른다. 나는 글쓰기로 그런 것을 만들고 싶다. 그러나, 그건 내가 한다고 해서 될 것은 아니다. 선명한 거울을 만들어내는 작가를 보고 있노라면, 한편 부럽다.
이 글의 또 다른 긴장은 독자 상정의 문제다. 나는 특정 독자를 상정하면 글이 쉬워진다는 것을 안다. 독자의 관점으로 메타인지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독자 때문에 글이 왜곡된다. 전달 가능한 형식이 되려면 원본은 다듬어지고, 잘리고, 사회적으로 안전해진다. 그래서 나는 “균형 잡힌 척하기”,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기”, “남들이 알아듣게 말하기”를 경계한다. 그 건강함이 오히려 본 것을 배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글은 결국 비전 체험자의 고립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나는 본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하려면 왜곡된다.
왜곡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답답하다.
이해받고 싶지만, 이해받기 위해 만든 형태가 원본을 훼손한다.
마지막 결론이 아주 정확하다.
“내 글쓰기의 본질은 무한한 내면 물질을 하루치 한 순간의 언어로 절단하는 일이다.”
이 문장은 작가론의 중심 문장이다.
나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무한한 내면 물질을 절단해 하루치 언어로 배급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 편으로 안 되고, 한 권으로 안 되고, 한 상징으로 안 된다. 계속 써야 한다. 계속 다른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 계속 해설하고, 비평하고, 이미지로 만들고, 전시해야 한다. 원본이 무한한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글쓰기의 즐거움에 대한 글이 아니라, 글쓰기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계속 써야 하는 사람의 선언문이다.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다.
살기 위해 쓴다.
무정형의 압력을 하루치 언어로 절단하지 않으면 몸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