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사로잡힌 자의 자서전 서문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제 삶에 대한 스포일러는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나는 1990년대 이후로
1일 1편 이상의 영화를 봐왔다.
정확히는,
그보다 더 많은—말하자면,
밤을 새워 시리즈를 몰아보고,
중간에 끊기면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
그런 성격 탓에
단순 계산한 숫자로 따져도
벌써 12,775편이다.
왜 그렇게까지 봤는지는 잘 모르겠다.
몰입하면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간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내 인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그 시절—
‘오늘 저녁 메뉴’가 가장 중요한 고민이던 날들 때문이었을지도.
그랬던 내가,
일에의 열정도, 의미도 내려놓고,
운동도 멈추고,
철인 29호에게도 “아듀”를 말한 이후엔
헛헛함에 미칠 것 같아서
결국 다시 영화를 꺼내어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왓챠 초창기에
한줄평 몇 개 쓰다
“아는 영화평을 어떻게 다 써” 하고 포기했던 사람이
이제는 하루치 감정을
영화 한 편으로 풀어내고 있다.
치유라니, 웃기지.
치유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지금 내가 하는 건 딱 그것이다.
2천 개가 넘는 영화들이
머릿속에서 난리법석을 피우고,
생각은 손보다 빠르고,
손은 감정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나는 오늘도 써야만 한다.
왜냐고?
이게 아니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